[한라칼럼] 광복 70주년 '부(負)의 유산'을 제대로 보자

[한라칼럼] 광복 70주년 '부(負)의 유산'을 제대로 보자
  • 입력 : 2015. 08.25(화)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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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한반도와 중국대륙, 일본을 연결하는 지점에 제주도가 있다. 서해와 동중국해 대한해협이 모여드는 길목이다. 그런데 이게 참 묘하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하면서 주변 여러 나라와 활발한 교류가 이뤄진다. 기원 무렵부터 탐라가 한반도 고대 왕국과 중국, 일본 등과 다양한 교류가 가능했던 이유다. 그렇지만 동아시아에 불길한 전쟁의 기운이 감돌 때 제주도는 전장터가 된다. 13세기 후반 제주도를 병참기지로 삼아 고려와 몽골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선 것이 그 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의 결과다. 이후 몽골세력은 100년간이나 제주도에 눌러앉았다.

무엇보다 20세기는 고통스런 시기였다. 그 정점에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탈이 있다. 한반도를 강제 병합한 일제는 1931년 무렵부터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제주도를 전쟁기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일제는 만주를 침략하고 괴뢰정권을 세운다. 알뜨르비행장은 이러한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에 건설이 시작됐다. 일제가 알뜨르평원에 비행장 건설에 나선 배경이다.

알뜨르비행장 일대에 첫 진주한 부대는 오무라(大村)비행대였다. 이로 인해 모슬포는 오무라부락으로 불리기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에서 패전에 이르기까지 15년간 일제는 제주섬 전체를 요새로 만들었다. 오늘날 알뜨르평원 일대에 비행기 격납고와 활주로, 콘크리트 벙커, 고사포진지, 거대 지하호 등이 남아있는 이유다.

이뿐일까. 제주도 오름 368곳 가운데 100여 오름이 일제가 구축한 지하갱도로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 길이만도 수십㎞에 달한다.

이러한 상흔은 제주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이다. 어두운 역사지만 반복돼서는 안 될 역사교훈현장으로서의 중요성을 간직한 유산이라는 의미다. 나치의 집단학살이 자행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이 부의 유산으로서 세계유산에 등재(1979년)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일본은 '부의 유산'을 역사를 미화하는 교묘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1996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히로시마 원폭돔의 경우는 원폭 피해 사실만을 부각시키면서 반발이 거셌다. 침략전쟁의 가해자가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한 것이다. 지난 7월 나가사키(長崎) 앞바다의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를 포함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역시 그랬다. 수백 명의 강제징용 조선인들이 극심한 희생과 고통을 겪은 현장이지만 이를 싹 빼버리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제주도에 남겨진 '부의 유산'도 마찬가지다. 20세기를 관통한 일제의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상을 보여주는 흔적이자 세계전쟁사적인 중요성이 큰 유산임에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유산으로서의 중요성이 거론되지만 제주도 등 관련 당국은 무관심이다. 평화의 섬으로서 동아시아의 평화의 중심축을 꿈꾸는 제주도로서는 '부의 유산'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 땜질식 정비사업으로 생색만 내는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광복 70주년이 됐지만 식민의 상처와 전쟁의 광기가 남긴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윤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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