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 미리 내러, 미리내로

[하루를 시작하며] 미리 내러, 미리내로
  • 입력 : 2015. 09.02(수) 00:00
  • 뉴미디어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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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술 냄새가 난다. 간밤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을까. 그날 첫 손님은 돈을 좀 달라고 했다. 배고파 빵이라도 사 먹어야겠다고. 마침 커피에 빵을 먹던 나는 동아리 소풍 도시락을 혼자 먹다 들킨 사람처럼 더 미안해져서 지폐 몇 장을 주었다. 하지만 잠시 후, 길 건너 마트에서 나오는 그의 손엔 소주가 들려 있었다. 서운하고 심통이 났다. 마시다 남은 밍근한 커피가 유난히 씁쓸했던 아침이다.

한동안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손톱만큼의 선의였지만, 제대로 쓰이지 않을까 한편 의심하면서도 매번 맘 약해졌다. 왜 돈을 주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상습적으로 그런다고, 동네 어르신께 심하게 꾸중 듣더니 다시는 오지 않는다. 가끔 길에서 죽은 듯 자고 있는 남루한 취객을 본다. 밥 대신 술을 먹었을 것이다. 배고파 마신 술은 그의 삶을 더 춥고 배고프게 할 텐데. 악순환이다. 오늘도 누군가 찾아와 배고프다고 하면 나는 또, 잠시 갈등해야 하리라.

#2 작년 연말 어느 저녁, 멀쑥한 청년이 찾아왔다. 일전에 아무개 형이랑 꽃을 사러 왔었단다. 그 형이 단골이고 자기도 몇 번 따라와서 구면이란다. 순간 머릿속으로 아는 얼굴들을 빠르게 검색했지만 그들은 없었다. 지갑을 잃어버렸고 돈을 빌려달란다.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이유는 지나치게 장황하다. 생면부지의 나에게 와서 이럴 때에는 본인은 얼마나 당혹스러울까싶어 별로 따지고 싶지 않았다. 몇 만원 못 받아도 괜찮았지만, 자기 전화번호까지 내 핸드폰에 찍어주며 갚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약속을 믿고 싶었다. 기다렸다. 약속한 날, 바쁘고 죄송하다는 문자가 왔다. 번거롭게 오지 않아도 좋다고 계좌를 찍어주었지만 그리고는 끝이었다.

기대를 접고도 한동안 마음이 어수선했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대학생 둘을 둔 가난한 엄마로서 심지어 '오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세대)'라는 젊은이들의 좌절이 곱씹혀 마음 아팠다. 아마도 그도 가끔, 갚으려했던 지폐 몇 장이 포스트잇처럼 뇌리 한 쪽에 붙어 나풀댈 것이다.

#3 TV 뉴스 한 꼭지. 서울의 한 중국음식점. 손님들이 한 그릇 먹고, 두 세 그릇 값을 내고 간다. 엄마와 같이 온 아이는 친구들에게 정성껏 메모를 남기고 아빠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짬뽕 두 그릇 값을 더 내고 간다. "모두가 굶지 않는 그날까지", "취준생을 위해 토스트 5개 남기고 갑니다. 어깨 펴고 파이팅", "어르신들 맛있게 드세요" 메모는 짧지만 사랑 가득하다. '따뜻한 한 턱 내기'다. 덕분에 어려운 이웃들이 끼니를 거르지 않게 되었다.

'미리내'는 백 년 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맡겨놓은 커피'운동에서 착안되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커피 값을 남겨 두던 것이 전 세계로 퍼졌다. '미리내'는 은하수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벌써 430번째 '미리내'가게가 문을 열었다.

우리는 유난히 '밥은 먹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다. 궁핍했던 과거 때문이라지만 밥상머리에서 싹트는 정을 알기에 '밥 때'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이리 오너라'만 하면 길 가던 나그네를 재워주던 '사랑방'. 정 많은 주인댁이 준비한 따뜻한 밥 한 끼는 당연했으리라. 우리 동네 '미리내'는 생각보다 훨씬 그 수가 적었다.

별 무리를 뜻하는 '미리내'처럼 작은 나눔이 모여, 반짝이는 빛 무리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은 더 환히 밝아질 것이다. 지갑을 닫기 전에 몇 푼 더. 오늘 점심, 고기국수 어떠세요? 미리 내러 미리내로 함께 가보죠?! <김문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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