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고종의 초상을 둘러싼 정치학

[책세상]고종의 초상을 둘러싼 정치학
● 권행가 '이미지와 권력'
  • 입력 : 2015. 12.04(금) 00:00
  • 편집부 기자 ejo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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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1852~1919)은 전통 양식의 초상화부터 유화, 사진, 삽화 등 다양한 이미지를 남겼다.

이전까지 일반인은 어진(御眞)을 함부로 볼 수 없었지만, 고종은 권력 강화 등을 위해 어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술사학자 권행가가 저술한 '이미지와 권력'은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고 왕의 초상이 대중에게 유포되면서 어떠한 이미지로 비쳤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먼저, 당시를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 압력 속에서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춰가야 했던 전환기"로 바라본다.

고종은 1884년 서양인 퍼시벌 로웰의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시대적 상황에서 외교적, 정치적 행위로 외국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재현하도록 한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무렵부터 그의 초상은 서구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포됐고 새비지 랜도어, 휴벗 보스 등에 의해 그림이나 삽화로 만들어졌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엽서나 기념품으로도 제작됐다.

저자는 "고종은 새로운 시각매체를 받아들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며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모를 바깥에 알리기 위해 스스로 상복 차림으로 서양인의 카메라 앞에 섰다"고 전한다.

그러나 서구 매체에 등장한 조선의 왕은 유약하고 무능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며 "일본인의 야만성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으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19세기 말 서양에서 유행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에 더 가깝게 묘사됐다고 책은 전한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고종과 순종뿐 아니라 황실 이미지의 생산과 유포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일본인들이 거의 해마다 고종이나 순종의 어진을 제작한 데 비해, 그 이후에는 일본인이 궁에 들어가 어진을 제작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244쪽)

저자는 "고종의 초상 만들기는 실패로 끝났다"면서도 "국내의 이미지 활용 역사에서 고종의 초상은 그 기원의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베개. 336쪽. 2만3천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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