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칼럼]'잠들지 않는 남도'를 허(許)하라

[한라칼럼]'잠들지 않는 남도'를 허(許)하라
  • 입력 : 2016. 03.22(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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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최고의 가수는 신중현이었다. 긴급조치 제9호가 공표되기 일년 전에 발표된 '미인'은 '삼천만의 애창곡'으로 불렸다. 4차 중동전쟁으로 유가는 치솟고 서민들의 생활고가 극심하던 시절 '미인'은 당대의 고단함을 날려버린 최고의 '위안'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1975년 4월 느닷없이 '미인'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미인'이 금지곡으로 지정된 이유에 대해 음악 평론가 강헌은 70년대의 청년문화 열풍이 문화권력으로 등장하면서 정권이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일협정회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던 때라 새로운 문화의 힘이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노래를 금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새로운 노래를 보급했다.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학교와 관공서에서 매일 아침 이 노래들이 울려 펴졌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작사, 박정희 대통령 각하 작곡, 노래 육군합창단'이라는 문구가 선명한 이 앨범은 바로 '국민건전가요곡집'이었다. 평론가 강헌의 표현을 빌리자면 70년대의 아이콘 신중현의 라이벌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노래를 금지하고 '건전가요'를 보급하는 권력의 '세심함'은 역설적으로 노래의 힘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노래는 힘이 세다. 가사 한 소절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미인'을 금지한 정권은 사라졌지만 '미인'은 여전히 살아남았다. 권력은 노래를 금지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할 힘은 없다. 지배할 수 없는데도 지배하려고 할 때 권력은 스스로의 함정에 빠진다.

일본 제국주의는 '황국신민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일본 군가풍의 '국민가요' 보급 운동을 펼쳤다. 스스로 '황군'이 되고자 했던 '군인 박정희'는 누구보다도 일본식 요나누키 장음계의 '일본 군가'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가 작곡한 '나의 조국'과 '새마을 노래'에서는 '일본 군가'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적 전통을 록 음악에 담은 '미인'이 금지곡이 되고 '일본군가' 풍인 '나의 조국'과 '새마을 노래'가 보급된 것을 우연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는 4월 3일 추념식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가 추모곡에서 빠졌다. 제주 4·3진상규명 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지 않고 불렸던 노래가 '잠들지 않는 남도'다. 권력이 4·3의 기억을 억압하고 심지어 왜곡까지 했을 때 노래의 힘으로 4·3을 기억하게 한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논란이 되고 4·3 추념일에 '잠들지 않는 남도'가 불려질 수 없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추념의 방식과 내용마저도 여전히 국가의 간섭을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했지만 여전히 권력은 제주 4·3을 '불편한 진실'로 여기고 있다.

제주 4·3을 국가폭력이라고 규정할 때 국가는 가해자다. 가해자가 가해의 책임에 대해 사과했으면서도 추념의 방식과 내용을 간섭하려 한다. '불편한 진실'은 감추고 국가가 승인하는 선에서 4·3을 박제화하려고 한다. 희생자 재심사 논란이, 노래마저 부를 수 없게 만드는 최근의 일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미인'을 금지곡으로 정한 박정희 정권은 사라졌지만 신중현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노래마저 부를 수 없게 만드는 권력의 미래가 무엇인지 우리 역사가 보여주는 사례다.

<김동현 탐라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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