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제주, 희망은 사람이다]현대무용가 김설진

[더 큰 제주, 희망은 사람이다]현대무용가 김설진
"아시아의 중심 제주 '현대무용 메카'로 만들고 싶어"
  • 입력 : 2016. 03.24(목) 00:00
  • 부미현 기자 bu8385@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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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댄서에서 시작해 지금은 국내 현대무용의 대들보로 자리잡은 김설진은 앞으로 고향 제주를 거점으로 둔 현대무용단을 꾸려 예술로 행복해지는 제주를 만들고 싶은 바람이 있다. 부미현기자

예술은 인류 공통의 언어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미술, 음악, 무용 작품이 주는 감동은 국적을 불문하며, 예술은 시공간을 넘어 모든 이들을 소통하게 한다. 제주출신 가운데 이를 증명해내고 있는 무용가가 있다. 현대무용단 '무버(mover)'의 김설진(36)예술감독이다. 그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현대무용단인 벨기에 현대무용단 '피핑톰(peeping tom)'에서 활약하며 춤으로 세계인과 소통해왔다. 우리에겐 모 케이블 방송 댄싱 경연 프로그램 '댄싱9' 시즌2의 MVP로 친숙하다. 20대 중반부터 2003년 제40회 전국 신인 무용 콩클 특상, 2006년 제1회 CJ '영 페스티벌' 무용부분 수상, 2007년 예술의 전당 '자유젊은무용' 당선 등 국내 무용계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무용수다. 그는 이제 '무버(Mover)'를 이끄는 예술감독으로 현대무용사의 한 페이지를 써나가고 있다. 김 감독을 22일 서울 사당동 무버 연습실에서 만났다.



온종일 춤만 추며 행복했던 20대
케이블 댄스 경연 우승자로 화제
유럽 유명 무용단 '피핑톰'서 활약
"예술로 먹고 살 수 있는 고향 꿈꿔"


"제주에서 정식 무용 수업을 받아 본 일 없이 스트릿 댄스를 주로 하다 방송댄서를 거쳐 대학에 가서야 정식으로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인지 20대 때에는 정말 춤에 미쳐 살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 때는 학교 수업을 듣고 나면 저녁에는 작품 구상, 그리고 밤늦게 부터 다시 다음날 새벽까지 춤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주위의 눈을 피해 춤을 춰와서인지 학교 안에서 춤을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고, 하루종일 춤만 출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의 노력이 지금에 이르게 한 것 같습니다."

무버의 작품은 공연 시장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오는 4월에도 1, 2일 공연에 이어 7일에는 신작 발표, 11일부터는 프랑스 공연에 나서는 등 빡빡한 스케줄이 예정돼 있다. 무버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월급제 무용단이다. 그를 포함 다섯명의 무용단 일원들은 직업으로서의 무용수의 삶을 살기 위해 창작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던 적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인식 자체는 깨고 싶습니다. 물론 예술가로서 궁핍하지 않으려면 현실에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예술가를 한국에서는 직업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공연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무버는 아직 척박한 국내 현대무용계의 지평을 넓히고 예술을 하면서도 곤궁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고 싶은 도전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삶 자체가 도전의 연속이었다. 춤을 배우고 싶어 제주에서 고교 재학 중 서울로 전학을 가 친척집에 더부살이를 하며 방송댄서 일을 한 그는 누군가의 백업댄서가 아닌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기본기는 부실했지만 갖고 있던 춤실력에 더해 그만의 창의성을 발휘한 창작 무용으로 실기를 통과, 서울예대에 진학했다. 졸업반일 때 우연히 접한 현대무용 작품에 매료돼 실력있는 무용 지망생들이 지원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졸업 뒤에는 간단한 의사소통만 되는 영어실력으로 머나먼 이국땅 벨기에의 이름난 현대무용단 '피핑톰'에 입단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생각하는 성격이 좀 있습니다. 제주에서 서울로 올라갔을 때, 대학에 진학했을 때, 벨기에로 떠났을 때 모두 포기해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일찌감치 무용계에서 인정을 받은 데다 유럽에서 내로라 하는 현대무용단에서 활약하던 그가 2014년 댄싱9에 도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무용계에서는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는데 현대무용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서라는게 그의 도전 이유였다. 방송에서 현대무용의 매력을 맘껏 발산한 그는 당당히 팀의 우승을 이끌고 MVP까지 거머쥐었다. 방송 이후 활동 영역이 넓어지기도 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국립현대무용단, 실용예술전문학교에서 강사로 나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현대무용가로 우뚝 서고 있는 그에게도 시작은 '미약'했다. 제주시 탑동과 신산공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배운 그다. 그러나 춤에 대한 열정으로 웨이브, 팝핀, 펑키, 락킹, 소울, 방송댄스, 재즈, 비보잉, 힙합 등 다양한 춤을 섭렵했고 우연히 접하게 된 영화 '백야' 속 주인공이 추는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예대 졸업 후 한예종에 들어가 현대무용으로 그 영역을 넓혔다. 어떻게 보면 무용의 정규 교육과정을 역주행 해 춤을 완성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 서울예대에 들어갔을 때 연습실에 옷걸이가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발레 연습을 할 때 사용하는 지지대 '바(bar)'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입학시험이 창작 작품 실기였기에 제 기본기는 엉망이었습니다. 무용에 대한 상식 조차 부족했던 저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때가 많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때로 막노동으로 돈을 벌어 학원에서 기본기를 익혔습니다."

낯을 가릴 정도로 내성적이고 여전히 무대가 두렵다는 그이지만 춤 하나만 보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한 것은 어쩌면 그의 몸에 흐르는 예술가의 기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내내 춤 추는 것을 만류해온 어머니가 젊은 시절 한국무용가의 꿈을 가졌던 것을 알게 됐다. 앨범 속 사진에 무용수의 모습을 한 어머니를 발견했고,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자신을 잉태해 꿈을 포기해야 했던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독일의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가 이끄는 '부버탈무용단'과 같이 제주를 거점으로 둔 현대무용단을 만드는 것이다. '부버탈무용단'의 영향으로 평소 우울하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던 부버탈이라는 도시는 예술의 성지가 됐다.

"예술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예술때문에 먹고 살수 있는 사람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은 제가 직접 경험했습니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프랑스 아비뇽 지역은 평소에는 사람마저 뜸한 소도시이지만 페스티벌 기간 마을 전체가 예술마을이 됩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한 달 간의 페스티벌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충분히 살아간다고 하네요. 페스티벌 기간 호텔이 동이나 노숙을 할 정도이니 말이지요. 독일 부버탈의 경우에도 댄스캠프가 열릴 때는 해외에서 무용수들이 모두 몰려듭니다. 그곳에서 세계의 무용가들이 만나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아시아권에서 찾기 용이한 제주지역은 그야말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곳입니다."

20여 년 전 제주시 탑동과 신산공원에서 가족과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춤연습을 하던 섬소년은 이처럼 국내 현대무용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길을 열어가는 든든한 무용가로 성장했다. 그는 이제 인터뷰 때마다 끊임없이 질문받는 '현대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답을 내린다.

"현대무용을 설명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발레는 아닌데 가끔 무대에서 노래도 하고 연기도 하고 춤도 추고, 그렇다고 뮤지컬도 아니고 행위예술도 아니고(웃음). 현대무용을 가장 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은 '현 시대 행해지는 자유로운 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표출하는 춤이며, 동시대에서 추는 많은 춤을 담아냅니다. 그래서 다양함을 존중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는 젊은 시절 답답하게만 느꼈던 고향 제주의 소중함을 비로소 느끼고 있다며 제주에 대한 진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제주의 젊은이들이 자신처럼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고 꿈이 있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줄 스승을 찾아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용기를 갖길 바란다며 언제든 '문은 열려있다'고 조언했다.





<현대무용가 김설진은?>

제주제일중학교와 제주공업고등학교(현 영주고), 서울예술대학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부터 벨기에 '피핑톰' 무용단 소속으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피핑톰 조안무를 맡고 있다.

댄싱 경연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 '댄싱9 시즌2'에 참가해 소속팀 우승과 더불어 개인 MVP에 선정됐다. '댄싱9시즌 3'에 캡틴으로 참가, 블루아이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2014년부터는 현대무용단 '무버'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부미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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