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를 70년이라고 한다면 4·3은 이 역사와 함께 걸어왔다. 서구의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서는 그들이 도달한 현대사의 높이를 바라보며 지난 70년은 절망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서구인들에게 고어(古語)가 되어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새롭게 각성하며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외신들까지 시민혁명이라며 서구를 향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환기한다고까지 하지 않는가.
고향을 떠나 있을 때에는 4·3을 생각해도 제삼자처럼 무심했었다. 지금은 이맘때쯤 늘 우울하다. 아직도 진실 규명이라든가, 유족들에 대한 배·보상 문제 등으로 제주는 아우성이다. 국가추념일로 제정된 후 몇 년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4·3국가추념일 행사에 불참한 대통령의 행보를 아쉬워하거나 탓하는 일로 4·3의 정신은 실종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해마다 관덕정 마당에서는 굿판이 열린다. '화해와 상생'의 의미라며, 이 모든 게 이루어질 것처럼 많은 제주인은 최면에 빠지고 만다.
외삼촌과 당숙께서는 4·3 이후 예비검속 때에 죽임을 당하셨다. 어머님께서는 맏이셨는데 외삼촌의 일을 전혀 말하지 않으셨다. 다만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교직에 헌신하셨다는 말들을 주위에서 전해 들었을 뿐이다. 당숙께서는 아버님과 나이가 같으셨는데 누구보다 서로 친하셨다고 한다. 반골이셨는지는 몰라도 곧은 말로 기개를 보이시기는 했을 터이다. 그러나 오직 살려내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님과 아버님께서는 죄인처럼 살다 가셨다.
며칠 4·3평화공원, 문예회관, 탑동광장 그리고 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을 두루 찾아다녔다. 4·3 영혼들을 위무한다는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4·3평화공원과 알뜨르 비행장을 찾았을 뿐인데 올해는 69돌이란 시간의 의미가 곧 세기를 넘길 것 같아서 행사가 있는 곳이면 다 찾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와 대면하게 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때문이었을까. 곧 쓰러질 것처럼 어지러웠다.
함께 참석했던 선배님께서는 굿을 보며 친근감이 들기도 하고 위로가 된다고 했는데, 한편으로 끄덕이기도 했다. 힘이 없었던 제주인의 처지로 4·3의 문제는 오랫동안 해결을 갈망했어도 별반 나아진 게 없었을 터, 비록 주술적이라고는 하지만 큰무당의 목소리로 위로가 되기도 했으리라. 이마저도 허락되지 못하던 날들의 원통함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한으로 쌓였다. 그래서 단 하루의 위로일지라도 삼백육십오 일을 견뎌내는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참담했다. 아직도 우리는 굿판에서 위로를 찾으려는 의식 안에 깊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이 변화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굿은 마당을 전제했으면서도 얼마나 주술적인가. 해마다 주술로 최면을 부르는 일은 또 얼마나 따분한가. 4·3의 문제 해결은 몹시도 어렵다. 주술적인 것으로 위로를 수용한다면 내년도 그럴 거고 십 년 후도 마찬가지다.
제주인들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해야 한다.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문제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정당성을 확보하고, 4·3의 진실도 객관화하여 그 심각성, 중요성이 공감으로 널리 확대돼야 한다. 지난 다섯 달 동안 광장에서 촛불을 밝혀 상식과 기본의 의미를 일깨웠듯이 4·3의 본질과 진실을 위해 집요하게 모든 문화 공간을 점령할 각오로 나아가야 한다. 70돌이 되는 내년에는 워싱턴 광장에서 조용히 4·3의 본질을 알리는 촛불을 밝혀도 좋겠다. <좌지수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