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함께] '4·3과 제주역사' 박찬식 센터장

[저자와 함께] '4·3과 제주역사' 박찬식 센터장
"4·3은 제주공동체 존립 위한 항쟁"
70주년에 맞춰 개정증보판
  • 입력 : 2018. 04.26(목)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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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은 좌·우 가릴 것 없이 제주4·3의 원인 등 사건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논문이 꾸준히 발표됐으면 한다고 했다.

무장봉기 전개과정 등 추가
"제주민중-미군정 대립 구도"


10년 전, 그는 580쪽 분량의 '4·3과 제주역사'를 내놓았다. 제주4·3 60주년이 되던 해였다. 책머리에 그는 "제주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4·3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했던 과거 전통시대 제주민란의 전형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했다. 제주의 독립·자치·자율의 전통과 연대와 공동체성이 외부의 힘에 의해 억눌려 파괴되어 갈 때 자연스레 제주민들이 저항했던 것이 4·3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제주4·3연구소와 인연을 맺으며 '군법회의 수형인명부'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토대로 첫 4·3연구논문을 썼다. 2000년 10월부터 2003년 3월까지는 정부가 구성한 4·3진상규명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서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지난 10년 동안에는 제주공항 유해발굴 책임을 맡아 암매장 행방불명 희생자들의 진실을 드러냈고 4·3연구소장으로 20주년 사업을 추진했다. 2012년부터는 4·3평화재단의 추가진상조사단을 이끌며 제주도내 마을별 4·3진상조사에 나섰다.

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이다. 그가 4·3 70주년을 맞아 '4·3과 제주역사' 개정증보판을 냈다. 764쪽으로 묶인 개정증보판은 몇 군데 고치고 다듬은 수준이 아니라 전체 20장 중에서 절반 가까운 9장을 10년새 새로 작성한 논문들로 채웠다. 4·3 당시 대중운동과 무장투쟁, 4·3 관련 행형자료와 형무소 재소자, 4·3과 여순사건의 비교 연구, 4·3연구의 쟁점 등이 추가됐다.

4·3을 '제주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항쟁'으로 규정한 그는 1947년 3·1집회와 총파업 투쟁, 1948년 5·10단선 거부투쟁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3·1 투쟁은 제주도 민란과 항일운동의 전통을 이은 민중운동사의 절정으로 지역과 계층이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5·10단선 거부투쟁은 해변마을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투표를 거부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이나 산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내려왔다. 일제치하의 고통을 겪은 제주 민중들은 반민족 세력을 척결하면서 이 땅에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건설될 수 있는 정부 형태를 꿈꿨다. 이 경우 4·3의 기본적 대립구도는 제주민중과 미군정을 정점으로 한 외부세력으로 봐야 한다.

이번에 무장봉기 전개 과정을 살핀 글을 새롭게 담은 그는 그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 여전히 버거웠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장봉기와 관련한 지속 연구는 그에게 던져진 또하나의 과제다.

"4·3 정명을 위해선 원인 규명이 우선이고 이를 다루는 논문이 꾸준히 발표돼야 합니다. 좌·우 가릴 것 없이 말입니다.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논문이 나오고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도서출판각. 4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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