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절 골목길, 저녁 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굽은등을 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자취방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 미디어가 애써 소식을 전하지 않더라도 웹이나 모바일로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는 이즈음에 그런 풍경들은 종종 제 빛깔을 잃은 채 흑백화면으로 처리되어 버린다.
제주대 국문과 교수로 있는 장이지 시인의 신작 시집 '레몬옐로'는 '사회적 신체'가 바뀌어가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은 우리의 존재를 더듬는 시들로 문을 연다. 장대비가 내리던 날 창문에 비친 빛을 레몬옐로로 부르며 이 땅에 내려앉은 이야기에 눈길을 뒀다.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고/ 나는 없다./ 나는 성기사와 싸우는 중이다./ 말하자면 나는 키메라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외로울 리 없다고/ 내 친구는 위서(僞書)처럼 서러운 말을 했다.'('키메라-유령' 부분)
스마트폰은 갖가지 일상을 처리해주는 기기다. 웹에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무한의 공간으로 진입한다. 원하지 않아도 온갖 정보가 빛을 타고 흘러든다. 그 손바닥만한 공간 안에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불러주고, 낯선 여행지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그 평평한 세계 안에 환하게 켜진 정보들은 내 생각들을 '공산품'으로 만든다. 그 세계에서 벗어나면 가혹한 나날이 어린 청춘들을 기다린다. 등에 낙서가 붙고, 교과서가 찢어지고, 사물함에는 오물이 들어 있는 교실('카스트'), 친누나와 함께 살다 서른 살에 자살한 내 친구('어느 날 치모'), 눈이 큰 아이가 삥을 뜯고 있는 골목('중2의 세계에서는 지금'), 통장 잔고가 십오만원인 서른세 살의 무명 배우('페르소나')가 있다.
'빛을 잃고 시들어가는 인생들'은그들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제주4·3에서 세월호까지 믿을 수 없는 일을 당해온 이들이 산다. 시집 군데군데 마르지 않는 눈물, 울음이 보이는 건 그 때문이리라.
'레몬옐로'의 끝은 발문이 달리는 여느 시집과 달리 웹처럼 링크를 걸어놓았다. 어째서 '개복치를 살려라'는 시를 짓게 되었는지, 시집에 텔레비전이란 말이 왜 가장 많이 쓰였는지 등 시어나 제목에 얽힌 사연을 풀어내 덧붙였다. 문학동네시인선으로 나왔다. 8000원. 진선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