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16년 만에 첫 소설집을 낸 양혜영 작가. 이즈음엔 80~90년대 제주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9편 단편 실린 '고요한 이웃'
출구 찾는 여린 존재들 담아80·90년대 배경 장편 집필 중
"바다를 보면 나는 떠나고 싶어진다. 늘 그랬지만,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떠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틈'의 주인공 연이의 목소리가 소설집 전체에 스며있는 듯 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꾸만 집을 버리고 도망친다. 그들에게 집은 더 이상 안온한 곳이 아니다.
제주 양혜영 소설가가 얼마 전 소설집 '고요한 이웃'을 냈다. 2002년 제주작가회의가 실시하는 '제주작가'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16년이 지나 내놓은 첫 창작집이다. "소설 공부를 더 해서 좋은 작품집을 내고 싶은 욕심"에 한 해 두 해 미루다보니 그만한 시간이 걸렸다. 그 오랜 기다림 끝에 9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은 탄탄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수록작들은 신춘문예 당선 등 한 차례 검증된 소설들이다. '틈'은 제주작가회의가 그에게 소설가란 이름을 달아준 작품이고 맨 앞에 실린 '오버 더 레인보우'는 200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2017년 경북일보 문학대전에 입상한 '랩의 제왕'도 담았다.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듯한 표제작 '고요한 이웃'은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화면' 안에는 남편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는 고니와 비쩍 마른 채 몸에 상처를 안은 이웃집 여자가 등장한다. 고니의 남편은 저녁 무렵 집안을 울리는 전화기 너머의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추측일 뿐이다. 벽면을 까만 점처럼 뒤덮은 날파리 떼, 실내를 가득 채우는 원인 모를 지독한 악취는 누군가의 죽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급기야 며칠 째 내린 비에도 바짝 마른 채 돌아와 있는 남편의 구두코는 의혹을 증폭시킨다. 남편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결국 고니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은 '틈'에도 있고 '오버 더 레인보우'에도 있다. 반신마비가 된 채 이혼 도장을 찍어야 했던 '틈'의 연이, 쫓겨나다시피 가족이란 울타리를 떠나왔지만 또 다른 가족으로 여겼던 동거인의 추악한 면을 마주하게 되는 '오버 더 레인보우'의 동성애자 '나'가 그렇다. 폭력과 모멸을 견디지 못하고 출구를 찾아나선 이들은 한없이 여리다. 그들 앞에는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까.
"온몸으로 사람이 사람을 품고 안는 세상. 그것이 소설"이라는 양 작가는 이즈음 80~90년대 제주를 배경으로 한 장편을 쓰고 있다. 첫 소설집을 내기까지 시일이 꽤 필요했지만 앞으론 활발히 작품집을 발표하고 싶다고 했다. 삶창.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