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함께] 시조선집 고정국 시인

[저자와 함께] 시조선집 고정국 시인
“마지막 시편 묶어… 이젠 물러설 때”
  • 입력 : 2019. 03.07(목)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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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중심부에서 체험했던 아픔의 산물을 모아 선집을 낸 제주 원로 고정국 시인이 이번을 마지막으로 시조쓰기를 멈추겠다고 말했다.

30여년 써온 작품 중 골라
단시조·연시조 등 100여편

'을'의 편에서 본 낮은 존재

'당초 너의 길은 낮은 데로 뚫렸어라/ 흉흉한 돌담 뿌리 해거름이 서러운 날/ 채석장 아득히 오는/ 정(釘) 소리로 우는 새야// 살아도 막장 같은 굴뚝이나 후비는 짓/ 대쪽 같은 목소리 담벼락에 찢겨나고/ 피 묻은 시어만 흘리는/ 날갯짓 그 행적이여'

신춘문예로 등단한 1988년 쓰여진 '굴뚝새'의 일부다. '한 생애 절반쯤은 누명 쓰고 사는 세상'이라며 굴뚝새 닮은 시인의 운명을 노래했던 제주 시인 고정국. 그가 30여 년 써온 작품 중에서 일부를 골라 선집을 묶었다. 단시조 55편, 연시조 52편, 시조 스토리텔링 5편 등 100여 편이 실린 '그리운 나주평야'다.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살아왔습니다.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세상 말입니다. '을'쪽에 서서 사물을 바라보다 보니 시적 대상도 들꽃과 같은 낮은 곳들이 많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선집에 담긴 시편엔 꽃, 섬, 바다 등이 자주 등장한다. 오므려 앉아 들여다보는 나지막한 꽃, 갇힌 자들의 설움이 있는 섬, 숱한 상처를 씻어내는 바다는 약하디 약한 존재들과 가깝다.

'노을 앞에 선다는 건 속울음을 삭이는 일/ 피 섞인 아우성으로 분절 없는 아우성으로/ 수장을 치러낸 바다가/ 수평선을 닫을 때// 겹겹이 둘러싸인 경계선을 다 지우고/ 먼저 간 술친구의 눈시울도 다 지우고/ 만종도 파장도 없이/ 섬이 혼자 저무네'('섬의 소멸' 중에서)

소리높여 외치지 않고 내면을 닦으며 인내하는 그의 시적 자아는 이미 '시조 일만 계단 내려 걷기'로 확인됐다. 시인은 '오르기'가 아니라 '내려 걷기'를 통해 겸손한 자세로 시조 창작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시집 50권 분량에 해당되는 시조 1만수를 썼다.

그는 '생의 중심부에서 체험했던 아픔의 산물'이라 칭한 시조들이 펼쳐진 이 선집을 끝으로 시조를 그만 쓰겠다는 뜻을 비쳤다. "이제는 물러설 때가 되었다"는 시인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소년 마놀린의 이름을 부르며 뭇 독자들에게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시편을 띄웠다. "이 덜 삭은 부엽토 한 줌이 자칫 그릇되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면서. 책만드는집.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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