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 꿈꾼 밑바닥 삶

[책세상]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 꿈꾼 밑바닥 삶
김용심의 '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
  • 입력 : 2019. 04.05(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그들은 '백정놈' 같은 대명사로 불렸다. 이름조차 사치였다. 먹고 입는 일만이 아니라 죽어서 장례까지 끔찍한 차별을 받았다. 공공장소를 오갈 때는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양 허리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야 했다. 신분제가 폐지된 지 30여 년이 흘렀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정들은 더는 참지 않았다. 1923년 봄,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뜨거운 꿈을 안은 백정들이 모여 형평사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든다. 형평사에서 형은 저울, 평은 평등, 사는 단체를 뜻한다.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단체'란 의미다. 1935년 대동사로 명칭이 바뀌어 사라질 때까지 형평사는 일제강점기에 단일 조직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이자 인권운동 단체였다.

김용심의 '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는 억눌리고 천대받던 그들을 불러낸 책이다. 아름다운 기생 자운선, 바지 입은 여자 단원 등이 활약했던 강음현 도적떼, 단지 백정이라는 이유로 길 가다 매를 맞아 죽은 매읍산 등 시대별로 뽑은 아홉 백정을 통해 그들의 삶과 역사, 저항을 들여다봤다.

'피를 묻히고 사는 자'로 밑바닥에 놓였던 그들이지만 일찍이 앞선 역사 의식을 가졌다. 인권 개념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백정을 향한 억압이 천부인권을 해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참다운 인간 해방을 내세운 형평사를 창립했다. 가장 낮은 자들이 가장 고귀한 가치인 평등을 이야기해준 셈이다.

120여 년전, 근래의 촛불집회와 닮은 만민공동회가 서울 종로에서 열렸을 때 첫 연설자로 단상에 오른 이는 백정 박성춘이었다. 나라의 큰 인물들과 나란히 선 그는 "한 개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매우 튼튼"하다고 말했다. '나라'라는 천막을 지탱하는 힘은 황제나 소수 지배층이 아니라 무수한 장대들, 무수한 백성들이라는 점을 그는 일깨웠다. 보리. 1만5000원. 진선희기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98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