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작/고재만 그림
9-2. 바람에 스치는 별
용찬이 대학을 졸업할 때 어머니가 올라왔었다. 그때 처음으로 해연은 용찬 어머니와 마주했다. 졸업식장에서 인사를 드리고, 사진도 찍고 저녁도 함께 먹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용찬이 프러포즈하기 전이었다.
용찬은 선물 꾸러미를 마루 위에 올려놓고 앉았다. 집을 둘러보던 해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일진이 안 좋은 건가? 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안 보이는 거지?"
"물구덕이 없는 걸 보니 물질 가셨나 봐."
"할머니가 여든이 다 되셨다는데 아직도 물질하셔?"
해연이가 용찬 옆에 앉아 팔짱을 꼈다.
"하루라도 물에 들지 않으면 몸이 가렵다면서 운동 삼아 다니셔. 깊은 물에는 못 들고 할망 바당에서 놀다 오지."
"할망 바당?"
"연세 많으신 할머니들이 노니는 얕은 바다야."
"히야 신기하다. 우리 바다에 마중 나가자."
삽화=고재만 화백
좁다랗고 꾸불꾸불한 길을 펴며 갯가로 차를 몰았지만, 어디에도 좀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입로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갯내음이 콧속을 파고들어 알싸했다. 해연이 바다를 안으려는 듯 팔을 벌리며 심호흡을 했다.
"아 이 냄새."
"저기 바위 보이지? 거기까지가 할망 바당이야. 바닥에 서면 허리까지 닿을 걸? 그 안에 있는 해산물은 노쇠한 할머니들 것이지."
해연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천천히 바다 위를 살폈다.
"안 보이는데?"
멀리서도 들려야 할 숨비소리도, 바다 위에 둥둥 떠 있어야 할 테왁도 보이지 않고 잔물결만 밀려와 바위를 어루만지며 놀고 있었다. 기대했던 장면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한 듯 해연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배 타고 멀리 나가셨나?"
용찬도 일이 자연스레 풀리지 않은 것에 마음이 착잡했으나 해연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에 화두를 돌렸다.
"참, 해연아, 가장 제주다운 관광지가 어딘지 알어?"
"가장 제주다운?"
"삼다도하면 돌, 바람, 여자 아냐?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예술공원으로 안내 하지."
해연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이 근처에 있어?"
"여기서 가까워."
"저것 봐.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머리칼. 하늘을 나는 듯한 해녀의 표정."
그의 작품은 그냥 심심풀이로 만든 게 아니라 제주의 전통 사상과 제주인의 정겨운 삶들을
치밀한 계획과 예술혼을 담아 장인의 기교로 만든 예술작품이었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2차선 지방도로를 달렸다. 라디오에서는 영화 '페드라'의 주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해연은 선글라스를 낀 채 음악에 심취하다가 바다 위에 섬 하나가 떠 오른 것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저거 비양도 맞지?"
"그래, 천 년 전에 갑자기 날아왔다던가, 솟아올랐다던가 그렇게 생긴 섬이야."
"꼭 아기코끼리가 웅크린 것같이 귀여운 섬이네."
"그렇지? 다음에 기회 만들어 같이 가보자."
해연은 비양도를 마음에 담으려는 듯 차창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데 도로 양옆으로 차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는 곳이 나왔다. 수영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맨발로 도로 위를 걷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아 여기 협재해수욕장이네? 내려서 사진 한 장 찍고 가자."
해연이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치며 윙크를 했다. 속도를 낮추고 천천히 굴곡진 도로를 펴자 넓고 하얀 모래벌판이 나왔다. 바다가 맞닿은 모래톱에선 아이들이 밀려오는 파도를 희롱하며 놀고 있었다.
협재해수욕장엔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잠시 내려 사진도 찍고 구경하려 했으나 차를 댈 곳이 없었다. 일렬로 주차한 차 옆에 일단 정차하고 얼른 내려 포즈를 잡은 해연의 모습 두 컷을 카메라에 담는데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협재해수욕장을 지나자 곧 관광지 표지판이 나왔다. 주차장에는 버스와 승용차들로 가득했다. 용찬은 잠시 길가에 차를 멈췄다.
"저기 들렸다 갈까? 시원한 동굴도 있는데?"
"어휴, 난 사람 많은 곳은 질색이야."
"좀, 그렇지. 여름엔 더 더욱..."
용찬이 차를 몰다 정차한 곳은 ㅇㅇ석물원이었다. 헌데 주차장이 텅 비어 있었다.
"관광지라면서 왜 이렇게 조용해?"
해연은 방금 본 관광 공원과 대비하면서 관광객이 없는 것을 의아해 했다.
"그거 가이드 탓이 크지. 가이드가 관광객들을 안내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건 어느 나라 관광지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일정을 짤 때부터 커미션을 안 주는 곳은 일정에 넣지 않는다. 관광농원이나 쇼핑센터, 면세점에서 관광객이 구입한 물품의 일정 액수와 관광지 입장료, 식사비 일부가 가이드의 수입이다. 특히나 사설 관광지 의 갖가지 쇼는 50% 내외를 가이드가 가져가기도 한다. 가이드는 그런 수입으로 기사 수고비와 자신의 임금을 벌충한다.
"그럼 여긴 커미션을 안 주나 보네?"
"입장료를 봐. 뭐가 남을 게 있겠어?"
해연이 고개를 숙여 매표소 박스 속에 갇힌 직원에게 물었다.
"언니, 여기 입장료가 왜 이렇게 싸요?"
"회장님 방침입니다."
매표소 직원과 대화하는 내용을 들었는지, 주차를 담당하던 사람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왔다.
"이곳은 사유지와 공유지가 반반이에요. 공유지를 빌려 영업행위를 하려면 심의를 받아야 하고 임대료가 엄청나게 오르죠. 그렇게 해서 요금을 올려봤자 가이드 주고 세금 내면 남는 게 없어요."
차라리 그럴 바엔 예술작품을 도민들에게 환원하는 차원에서 주차요금만 받고 무상 공개하라고 석공예 명장이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석물원을 만들고 가꾸어온 장 명장은 평생을 돌챙이(석수장이)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돌하르방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정을 두드리다 손가락이 나가고, 발등을 찧고 돌 조각 파편에 얼굴과 온몸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명장이 됐다. 제주를 방문하는 외국 정부의 수반들에게 선물하는 기념품도 전부 그의 작품이라고 했다.
"아니 어떻게 돌을 가지고 이렇게 부드러운 미소와 우스꽝스런 표정들을 만들 수 있지?"
해연은 소품 하나에도 오랜 시간 머물며 이리저리 살피다 카메라에 담았다.
"저것 봐. 바람에 날리는 여인의 머리칼. 하늘을 나는 듯한 해녀의 표정."
그의 작품은 그냥 심심풀이로 만든 게 아니라 제주의 전통 사상과 제주인의 정겨운 삶들을 치밀한 계획과 예술혼을 담아 장인의 기교로 만든 예술작품이었다.
때로는 해학적이면서도 때로는 진지하고, 과거의 소재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도 있었다. 마치 반죽하여 만들어 놓은 것처럼 돌을 자유자재로 깎고 다듬어서 만든 소품들도 앙증맞았다. 장인이 살아온 격동의 세월 속에 그가 겪었을 어려움과 고통, 아픔과 기쁨이 땀과 열정으로 녹아든 작품들이었다.
"할머니, 해연이가 무슨 잘못 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방안 사람를 쏘아 보며 들입다 쏟아 부었다.
"그놈이 퍼뜨린 종잔데 무사 죄가 어시니? 느네 아방도 똑같은 놈이야.
용찬이 어멍아, 느 언니 죽은 이야긴 무사 안 해시니?"
"아니 누게라고? 도의원 손지?"
용찬이 해연과 함께 절을 하고 자리에 앉자, 할머니가 담뱃대를 놋재떨이에 털며 해연 집안의 족보를 캤다.
어머니는 할머니 옆에서 얘기를 들으며 참외를 깎았다.
"예. 도의원 하셨던 제 할아버님 함자가 동자 철자 입니다."
해연이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할머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벌레 씹은 얼굴로 해연을 노려봤다.
"뭐여? 장동철?"
"예. 맞습니다. 할머님."
할머니는 대뜸 담뱃대를 던지듯 땅바닥에 놓더니 불콰한 표정으로 역정을 냈다.
"아니 그놈이 어떤 짓을 했는지 용찬이 넌 몰람시냐?"
그의 과거 전력에 대해서는 제사 때 듣고 충격 받았던 일이 생각났으나 이미 그건 과거의 일이라고 선을 그은 지 오래다.
"할머니, 저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건 몇 십 년이 지난 옛날 일이잖아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 우리 집안하고는 웬수여, 웬수. 그걸 알고도 어멍은 가만히 이서시냐?"
해연의 얼굴이 갑자기 하얘졌다. 그렇잖아도 어른들에게 인사드린다고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당혹스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아연할 노릇이었다.
"느 아방이 누게 때문 죽어신디? 느네 하르방도 경 고향에 오고싶언 해도 오지 못허연 일본에서 죽었다. 느그 잘난 하르방 때문에. 도둑질 해 간 우리 땅도 내놓으랜 허라."
말릴 틈도 없이 할머니는 목울대를 돋우며 죄인 문초하듯 추궁했고, 해연은 경황없는 돌발적인 상황에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황당한 건 용찬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 해연이가 무슨 잘못 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는 방안 사람들을 쏘아보며 들입다 쏟아 부었다.
"그놈이 퍼뜨린 종잔데 무사 죄가 어서? 느네 아방도 똑같은 놈이야. 용찬이 어멍아, 느 언니 죽은 이야긴 무사 안 해시니?"
어머니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어머님, 차차 이야기 허잰 해수다."
해연을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구해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어서 일어서라는 눈치를 주었다. 할머니는 옆에 있는 봉지를 당겨 담뱃가루를 담뱃대에 재어 놓으며 완고하게 말했다.
"안 되어. 혼인은 사름이 아니라 집안끼리 하는 거여."
"할머니, 지금 결혼하자고 온 게 아니라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그게 그거주. 결혼 안 하려면 무사 인사 시키느니?"
용찬은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심사로 해연을 일으켜 세웠다.
"할머니, 나중에 다시 찾아뵐게요. 저 그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집안과 결혼은 절대 안 돼."
해연을 부축하고 나오는 용찬의 뒤통수에 대고 할머니는 쐐기를 박으셨다.
해연은 화장이 번지는 것도 모르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발을 신고 섬돌을 내려선 해연에게 용찬은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노친네 말 너무 깊게 생각지 말아."
"오빠, 나 잠깐 바람 좀..."
내미는 손수건도 외면한 채 해연은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해연아."
용찬이 따라 가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어머니가 마당으로 내려서며 불렀다.
"용찬아, 나 좀 보자."
어머니의 축 쳐진 어깨를 보면서 용찬이 안채로 따라 들어갔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