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가을을 지나고 있다. 흐르는 가을 공간 한라산과 오름에는 단풍이 붉게 물들고, 중산간에는 억새꽃이 피어나 내리쬐는 햇살과 바람을 안고 지나가는 구름에 따라 은갈치 비늘처럼 일렁인다. 곶자왈의 찔레와 멩개낭(청미래덩굴)도 빨간 열매로 새들을 유혹한다. 감귤도 물들어 수확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린다. 값이 나가든 값이 나가지 않든 밭에는 사람들의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겉으로 화려함과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듯 하지만 속으론 여름과 가을이 마주치는 자리에서 이름도 생소한 가을장마가 이어지고 일주일, 열흘 간격으로 몰아친 태풍도 녹아있다. 땅속 굼벵이와 지렁이,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나무와 풀, 이들과 어울려 사는 노루와 족제비, 하늘을 나는 새에 이르기까지 시커먼 구름 사이로 번개기둥이 번쩍이며 몇 초 있다가 온몸을 전율에 떨게 하던 천둥소리, 제주 섬 전체에 퍼졌던 것도 그들 나름대로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거다.
미세먼지로 덮였던 봄과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던 여름을 지난 현재까지 제주는 제2공항 건설문제로 시끄럽다. 오름과 동굴과 그 곳에 서식하는 동식물과 함께 생업을 이어온 주민들은 반대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도 밀어붙이려고 한다. 물론 다른 목소리도 있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도민의 의견을 물어보자한다. 그런데도 도정은 이러한 의견을 묵살하고 있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것이 해군기지이다. 몇 년이 지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민군관광복합미항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해 도민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하와이와 나폴리 같은 미항으로 제주관광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도 선전했다. 허나 지금 와서 보면 어떠한가. 민간이 거의 쓰지도 못하고 관광에도 그리 보탬이 되는 것 같지 않은 것은 혼자의 생각은 아닐 터이다. 더 큰 것은 아직까지 주민들간 갈등의 앙금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지만 아픈 기억도 되살려야 한다.
여기에서 150여 년 전에 영국에서 있던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시골의 가축품평회 행사장, 사람들은 표를 사서 자기가 생각하는 소의 무게를 적어 투표함에 넣었다. 나중에 소의 무게를 달아서 가장 근접한 무게를 써 넣은 사람에게 소를 상품으로 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확하게 맞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800개의 표 중 숫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13장을 제외한 787개의 표에 적힌 무게를 평균 냈더니 1197파운드(542킬로그램)였다. 실제로 측정한 소의 무게는 1198파운드(543킬로그램)였다. 군중을 한 사람으로 보면 완벽한 판단력이다. 충격적이지 않은가. 집단의 지적능력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신영복 '담론' p17 돌베개)
인간을 자연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민주주의 역시 지역주민과 따로 떼어 내서는 존재할 수 없다. 주민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도, 더구나 과거의 아픈 기억을 또다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들어보는 이러한 방법은 되새겨볼만한 일이 아닌가. <송창우 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