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미의 한라칼럼]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고찬미의 한라칼럼]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 입력 : 2020. 08.04(화)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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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철저하게 악하지도 않고 지극히 선하지도 않다."

'로마사 논고'에 나오는 마키아벨리의 이 말은 선악 이분법으로 인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오래된 명제 중 하나다. 인간이길 포기한 극악범죄자를 제외하고, 대개 선과 악이 혼재된 이 사회에서 한 사람이 때론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느 순간 무고한 피해자 또한 될 수 있음을 흔히들 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릇 가해자라 하면 악행만 일삼는 자로 피해자는 반면 선량하게만 살다 불운을 겪게 된 자로 단정 지어 버릴 때가 더 많은 게 사실이다.

최근에 자주 목도되는 위력이나 위계로 인한 피해 폭로는 특히 개개인의 문제로만 볼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구조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진위를 밝혀내야 하는 권력형 갑질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사건에서 피해 폭로자는 피해자임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지리멸렬한 사실관계 입증 과정을 더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악랄한 가해자' '선량하고 무고한 피해자' 구도를 처음부터 끌고 와 피해자가 정녕 피해자다운지 섣불리 판단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의 지나온 삶과 도덕적 평판에 엉뚱하게 기대어 피해사실 가능 여부를 가리려 하고 정작 피해 폭로자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설령 듣더라도 피해자의 삶은 순수하고 고결해야 한다는 잘못된 편견이 만든 '피해자 프레임' 내에서 폭로의 진위를 구별하는 것이다. 메신저가 소위 '고결한 피해자' 자격을 갖췄는지 여부가 더 관심을 끌면서, 어렵게 세상 밖으로 나온 피해자는 그 인생 전체를 공개해야 하는 청문회장 안으로 떠밀리듯 이제 들어가야 한다.

세상의 구경거리가 돼버린 이 공방전에서 가해자 혐의를 받는 자들과 이를 두둔하는 세력들의 주된 방어 전략은 피해자를 되려 공격하면서 그 위치까지 빼앗는 것이다. 정말로 억울하다면 무고를 애써 증명하면 될텐데도 "저 또한 알고 보면 피해자"라며 감정과 동정에 호소하는 여론전을 벌이는 것을 더 보게 된다. 또한 기득권을 누리는 자신의 현 위치를 부인하며 여전히(?) 거악 세력의 억압을 받는 사회적 약자로서 음해를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더군다나 '작은' 오점으로 기존의 위대한 업적이 가려지기에 피해자보다 더 위중하고 심각한 피해자가 됐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들은 자신을 피해자라고 말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끝내 밝히지 못하는 경우조차 있다. 피해자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말 못할 고통을 정제된 언어로 바깥에 내놓기까지는 힘든 과정을 긴 시간 동안 거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폭로 이후 자신의 증언이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다른 행적들과 결부돼 의심받거나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을 알면서도 피해 생존자로서 떨리는 목소리를 노출까지는 그 무엇보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진짜 피해자라면 흠결 없는 인생과 그 순도부터 증명해내라는 또 다른 가해를 멈추지 않고 계속할 것인가. 일단 해당 사안에 대한 피해 내역과 더불어 피해자임을 밝히기 위해 그들이 말하는 고통스러웠던 과정을 경청해주자. 검증과 판단은 그 이후부터다. <고찬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문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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