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부정되고 삭제되는 존재들의 지속 위해

[책세상] 부정되고 삭제되는 존재들의 지속 위해
에밀리 정민 윤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
  • 입력 : 2020. 08.28(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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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참상 알리려 창작
피해 당사자 고통에 몰입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민자이자 여성 시인이다. 에밀리 정민 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던 만 10살에 캐나다에 처음 발을 디뎠고 다른 국가에서 삶을 일궈온 그는 대학 시절 논문을 작성하다 전쟁범죄의 그늘을 접하게 된다.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취득한 뉴욕대에 있는 동안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그의 말대로 완곡한 표현인 '위안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멈추지 못하고 써 내려간 초안을 바탕으로 2018년 발표한 첫 시집이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이다. 낯선 땅에서 언어 구사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시인을 자유롭게 했던 창작으로 탄생한 시편들이었다. 미국 문단에서 '전 세계 여성의 아픔을 헤아린 깊이 있는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던 그의 시집이 우리말로 옮겨져 출간됐다.

시집은 고발, 증언, 고백, 사후 네 개의 장으로 구성돼 35편의 시가 실렸다. 일인칭 시점의 산문시들은 언어유희 같은 실험성을 더해 형식을 자유롭게 확장해간다. 때로는 단어와 문장 사이에 빈 공간을 불규칙적으로 배치해 삭제된 기억을 환기시킨다. 이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실제 증언 필사본과 다큐멘터리 자료에 기초한 '증언들' 연작시에 도드라진 것들로 '나'와 '타인'의 경계를 넘어 당사자들의 고통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증언들'엔 황금주, 진경팽, 강덕경, 김상희, 김윤심, 박경순(가명), 김순덕 등 실제 '위안부' 여성 일곱 명의 이름을 넣었다.

그의 시집은 과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건이 심장부에 놓여있지만 현재를 관통한다. 이민자, 동양인, 여성으로서 자신이 경험하고 목격했던 숱한 차별과 배제의 장면들을 통해 여성을 대상으로 행해진 무수한 폭력의 단면, 저마다의 이익에 충실하며 왜곡되어 온 역사 인식의 실태, 혐오가 섞인 일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시인은 한국어판 서문에서 미국과 달리 이 시집의 목적이 '알림'이 아니라 '지속시킴'이라고 적었다. 이미 아는 역사라고 해도 꾸준한 감정적, 담론적 참여를 통해 지금까지도 부정되고 삭제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고, 문학이 그 참여를 돕는다고 했다. 소설가 한유주씨가 번역을 맡았다. 열림원.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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