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가작-소설] 떠도는 도시-차영일

[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가작-소설] 떠도는 도시-차영일
  • 입력 : 2021. 01.01(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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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최현진

한 달 넘게 수십 장의 이력서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지만 차비도 건지지 못했다
비에 젖지 않도록 한 손에는 휴대폰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비닐로 감싼 서류봉투를 바투 걸머쥐었다
진동음이 느껴졌다… 기다리던 전화는 아니었다


물은 낮은 데로만 흘러내렸다. 야트막한 경사의 작은 홈이나 틈이나 웅덩이를 지나가다 고이면 다음 물살이 고인 물을 끌어내어 아래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곧바로 수면은 빠르게 높아져서 조금 전의 길은 금세 지워졌다. 물은 계속 고이면서 경사의 끝을 지우며 수평선을 지면보다 높고 빠르게 끌어올렸다. 사람들은 길을 지나는 게 아니라 물을 건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마다 특색 있는 걸음걸이처럼 물은 사람을 만나 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도시는 물소리 때문에 계속 시끄러웠다.

대수는 통제되기 직전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왔다. 거센 빗방울이 사람들의 거죽을 쿡쿡 찔러댔다. 사람들은 허리를 굽히며 우산을 방패 삼아 전진하느라 느리게 이동했다. 우산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가장 무거운 단 하나의 무엇처럼 보였다. 대수는 지켜야 하기에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첨벙첨벙 물소리가 났다. 우산 없이 걸어가던 대수는 빗물이 가시처럼 느껴졌다. 점점 온몸에 뭔가가 꽂히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때에야 허전함을 느꼈다. 지하철에 뭔가를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가로저었다. 현기증 때문에 미끄러질 뻔했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 흔드는 일을 멈추었다.

오늘도 퇴짜를 맞았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네요. 인쇄소 사장은 대수의 이력서를 보자마자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따귀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당신은 또 벌을 받아야겠군. 대수를 내리깔아 보던 사장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시켜만 달라는 간청이 목울대를 떨게 했다. 에어컨과 선풍기 앞에 섰는데도 땀이 흘렀다. 이쪽 계통에 경험도 없는 데다가 자꾸 말해서 미안하지만 나이도 많고, 사대보험 들 처지도 아니라면서? 사장은 혀를 찼다. 돈도 못 버는 죄인이 무슨 위인이랍시고 깝죽거리느냐고 호통치던 노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슴인형을 사달라고 한 달 전부터 졸라대던 희아의 우는소리도 들려왔다. 치욕을 치르더라도 마련해야 할 사슴인형이었다. 대수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 달 넘게 수십 장의 이력서를 들고 바깥으로 나왔지만 차비도 건지지 못했다. 저지대의 교차로에서 눈만 끔뻑거렸다. 대수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비에 젖지 않도록 한 손에는 휴대폰을, 나머지 한 손으로는 비닐로 감싼 서류봉투를 바투 걸머쥐었다. 진동음이 느껴졌다. 비틀어 쥔 손목에 빗물이 스며들었다. 대수는 장대비를 피해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전화는 아니었다.

조폭 영화에서나 봤던 신체포기각서를 쓸 뻔했다. 사흘 만에 원금 빼고 백오십만 원이던 이자가 이백만 원으로 불었다. 정부가 고리대금업을 단속한다고 해도 그들은 저지대로 몰려드는 물처럼 은밀했고, 어느 때는 가파른 언덕을 순식간에 내려오는 점령군처럼 무자비했다. 나름 업계에서 양심적이라고 말하던 사장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었으나 제 목숨값이 오십만 원이라는 데 기가 막혀 힘이 쑥 빠졌다. 신체를 포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삼 일을 더 산다는 기대감에 문을 열 힘이 생겼다. 저렇게 살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사내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수는 돌아보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문을 등지고 중얼거렸다. 속도 없는 놈, 사내답지 못하게! 신문지를 방망이 삼아 후려치던 아버지의 말을 저도 모르게 뇌까리는데 아무나 붙잡고 욕을 해댈 뻔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계단 난간을 잡고 주저앉아 이력서를 구겼다. 구겨진 이력서를 북북 찢으려다 말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신발끈을 매는데 희아가 바짓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오늘은 꼭 사슴인형 사 올 거지? 한 달이 넘었잖아. 도깨비도 약속 지키는데 아빠는 뭐야. 대수는 희아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아빠 믿지? 목젖이 따가웠다. 아빠를 믿느니 여기 네 동생을 믿는 게 낫겠다. 아내가 희아를 대수의 품에서 빼내며 약을 올렸다. 아내의 부풀어 오른 배를 보자 눈이 시큼해졌다. 희아가 제 엄마의 배에 귀를 갖다 대며 말했다. 동생아, 이 언니 믿지? 아내는 대수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멈추었다. 희아 하는 말 들었어? 애가 금방 배우잖아. 우리 딸까지 거짓말쟁이로 만들 거야? 둘째의 출산예정일은 삼 일 후였다. 출생신고서냐, 신체포기각서냐? 아무 데나 사인을 휘갈기면 그만일 텐데……. 문득 사냥으로 잡은 사슴을 어깨에 둘러메고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들어서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수는 웃으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아내는 기대하지 않지만 웃는 걸 보니 안심은 된다고 등을 두드리며 배웅했다. 위쪽으로 난 계단에 햇볕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대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는 뒤를 돌아볼까 해서 잠시 멈춰 섰다가 유리문을 열고 나섰다.

대수는 땡볕으로 나왔다. 팻말을 들고 확성기에다 헌혈하라고 고함지르는 적십자 직원을 보며 담배를 물었다. 마지막 담배였다. 술을 끊어도 사슴인형을 사지 못했다. 담배라도 끊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피라도 팔아야 할까? 아이는 성탄절도 아닌데 왜 자꾸 사슴인형을 사달라고 졸라대지? 이곳은 피 흘린 사슴이 어울리는 원시림이다. 대수는 화들짝 놀라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입술이 델 때까지 필터를 빨았다.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쥐어짜는 고리대금업자처럼.

도시의 발달 과정에 사슴은 어떤 상징이었을까? 사슴 한 마리조차 사냥할 도구도, 힘도, 용기도 가지지 못한 아비는 징벌 되어야 마땅할까? 물물교환할 처지가 못 되니 밥을 덜 축내는 거로 아비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가? 대수는 땡볕 속을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허기를 잊는 게 잘 안 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썩은 동아줄로 고래심줄 같은 세상을 어떻게 이겨 먹겠냐고 묻던 아버지에게 대수는 소리를 질렀다. 칠 년입니다, 칠 년! 그동안 어떻게 아버지를 이길 것인지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처럼 독하고 못된 저질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항복하는 거라고요! 대수는 다섯 군데를 더 돌아다녔지만, 사슴인형을 언제 장만할지 상상조차 못했다.

광택 나는 중형차를 타고 날마다 넥타이를 바꿔 매며 출근하던 금융종사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삼대독자에게 무지렁이, 가난뱅이 시절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집착했다. 아버지의 말처럼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무지와 가난 따위에 대수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수는 고시생활을 청산하고 악성채권을 받아내는 금융맨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지만,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부자지간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독립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대수를 대문 밖으로 내치면서 말했다. 건물에 금이 생기면 틈새는 걷잡을 수 없게 늘어나는 법이야. 틈새는 온갖 벌레들의 집이 되고 말지. 그 벌레가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롭지 않거든. 사람이 살려고 만든 집에 벌레가 들어오는 걸 그대로 놔두면서 무슨 궁리를 제대로 하겠어. 대수는 아버지의 말을 비틀어 대꾸했다. 앙금이겠지요, 아버지가 억지로 만들어낸 그놈의 앙금 때문에 나는 버러지가 됐다고요. 그건 아버지가 만든 거라고요.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혔던 그날에도 장맛비가 쏟아졌다. 앙금은 장맛비처럼 대수의 젊은 날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고객인 체하는 악성채무자에게 넌더리가 나고, 실적 운운하면서 감봉조치라는 벌칙을 수시로 반복하는 팀장에게 살기가 느껴졌다.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보다 더 강하게 자신을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수는 악성채권 리스트에서 동창의 이름을 발견하고 전화를 걸었다. 술이나 한잔하자는 제안을 마다하던 동창에게 대수는 말했다. 내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이제 얘기해야겠네. 악성채권팀의 오대수입니다. 전화를 끊으려던 동창이 말을 잇지 못했다. 대수는 맹수처럼 동창의 급소를 물고 늘어졌다. 그래도 넌 행운아야. 나한테 딱 걸렸으니까. 동창은 백기를 들었다. 그게 올가미가 될 거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 어쩌면 올가미에 빠져 허우적거리더라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독립하는 자유가 더 달콤했는지도 몰랐다. 동창의 악성채권을 자신의 신용대출로 갚는 조건으로 편의점을 인수했다.

대수는 전봇대를 붙잡고 멈춰 섰다. 통증이 몰려왔다. 사대보험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급여를 깎으면서 들어갔던 택배회사에서의 둘째 날 아침부터 허리에 담이 올라왔다. 연립주택 오층에 헬스기구를 배달하다가 허리가 꺾였다. 다음 날, 착불로 반품한다던 전화를 받고 그만두었다. 그때 얻은 통증이 수시로 몰려왔다. 음주운전 사고로 구치소에 구금되면서 통증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사채를 빌려서라도 합의해야 한다고 울먹거릴 때는 아파서였는지 억울해서였는지 분간을 못했다. 아내가 급전을 빌려왔을 때 대수는 편의점의 나날을 떠올리며 통증을 잊었다. 과거의 치욕과 분노로 현재의 통증을 잊는 궁여지책이 무자비하게 느껴졌지만, 꽤 쓸 만했다. 대수는 통증을 잊으려 할 때마다 그때를 떠올렸다.

편의점은 장사가 잘되었다. 노름빚만 아니었으면 충분히 먹고살 만했다는 동창의 말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도박할 만큼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는 데 매료되었다. 그 당시 주변 상권에 편의점은 많지 않았다. 본사의 관리는 각박한 이윤이 타당하다고 여길 만큼 철두철미했다. 본사의 횡포가 부당하다고 여길 만큼 장사에 눈이 밝지는 않았지만, 편의점은 실속이 넘치는 금광처럼 보였다. 편의점의 이윤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투자금을 채워갔다. 이중생활도 지겨웠다.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냈다. 돈을 빌리는 일은 일종의 선택받은 계층이어서 가능하고, 기회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임에도 고의로 신용을 포기하는 연체자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지쳤다. 일부 악성채무자를 통해 생 전체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거야말로 아버지가 말한 금처럼 느껴졌다. 연체자도 고객이라는 데 동의하지 못할 때마다 생겨나는 자잘한 스트레스와 지속적인 채권추심은 건물을 무너뜨리는 금처럼 여겨졌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금을 지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대수는 지금에서야 그 결심을 후회했다. 자신의 삶에 빗금으로 들어와 균열을 일으켰던 것들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직장을 그만두자 선량한 동창이 말한 대로 시간이 남아 주식에 손댔다. 그리고 아내를 만났다. 편의점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하루마다 정산하며 이익을 확인하던 순간의 기쁨에 사로잡혀서 주식에다가 가상화폐에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편의점의 야간을 지키던 여자가 아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여자를 관리직으로 끌어올리면서 겹벌이만큼의 급여를 책정하지 않았더라면 거미줄에 걸려 바동거리는 벌레 꼴은 피했을지도 모르는데…….

물건만 사고팔았던 게 아니라 아버지도 팔았고, 돈도 팔았고, 사랑도 팔았지. 편의점처럼 나는 다 팔았어. 못 팔아서 안달이었지. 그런데 그게 다 채무가 되었어. 어느 날 눈 떠 보니 나는 압류 당했어. 대수가 술 취해 친구에게 넋두리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넋두리를 받아줄 사람도 없다는 사실에 묘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것은 대수가 지금에는 가질 수 없는 사슴인형 같은 것이었다.

대수는 사채업자를 다시 찾아갔다. 사슴인형을 마련하려 웃돈을 더 얻을 요량이었다. 사채업자는 원금이라도 가져오면 얼마든지 빌려주겠다며 웃었다. 대수도 같이 웃었다.

대수는 동전을 밀어 넣으며 전화를 걸었다. 일 년 만의 통화였다. 막내누나는 학부모 모임이 있다고 말했다. 잘 지내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가족 중에 그나마 대화가 되던 누나였다.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온 여자를 박대한 것도 누나였다. 막내누나가 옳았다. 눈물을 참으려고 둘째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둘째도 잘 지내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수는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뜬금없이 인연 끊었던 놈이 뜬금없이 전화 오니까 잘 지내지 못할 것 같네.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대수는 큰누나의 가게로 갔다. 그저 배가 고팠다. 아무하고나 실컷 떠들어대고 싶었다.



그래, 실컷 울어보자
도시가 수몰되기에는 부족한 빗물이다
도시가 완전히 잠기도록 눈물이라도 보태주자

몸을 뒤집어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슴이 떼를 지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건 먹고살 만하니까 지겹지는 않지. 너는 과거지사라고 해봤자 온통 구질구질한 빚이고, 말도 안 되는 결혼이고, 집안 망신으로도 모자라 거덜 내는 이야기뿐이잖아. 네가 이렇게 험한 꼴 겪는 게 나중에 아버지처럼 떵떵거리며 살려고 일부러 고생하는 거라고 여겨도, 그래 봤자……."

대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큰누나는 말을 잇지 않았다. 빈 잔에 소주를 따라주던 누나의 꺼칠한 손등만 바라봤다. 침묵은 무전취식에 대한 최소한의 결제 화폐처럼 여겨졌다. 억지로 된장국에다 밥알을 말아 입에 넣어도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수는 단체 손님을 맞이하느라 일어서던 누나의 등에 대고 말했다.

"다시는 안 찾아올게. 미안하다고도 안 할게."

누나가 멈칫거렸다가 급하게 슬리퍼를 신고 대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주방 아주머니를 닦달하는 소리가 대수의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했다. 주섬주섬 신발을 신는데 담배나 피우자며 매형이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채 신발끈을 묶으며 끊었다고 대답했다. 언제 끊었느냐는 말에 오늘 끊었다고 대꾸했다. 매형까지 봉변당하려고 그러냐는 대수를 가게 밖으로 끌고 간 매형은 대수의 입에 담배를 물렸다.

"처남댁이 다녀갔어. 고집 그만 부리고 아버지 찾아봬. 둘째 출산일이 오늘 내일이라면서?"



직장을 그만둔 지 채 삼 개월도 되지 않아서 위기가 닥쳐왔다. 리스크를 계산하고 관리할 수완도 갖추지 못했다. 맞은편 도로에 같은 간판을 건 편의점이 생겨난 게 신호탄이었다. 계약위반이 아니라는 본사 담당자의 답변은 완벽할 정도로 논리적이었다. 두 번째 재앙은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닥쳐왔다. 동네가 재개발로 지정된다는 소문이 확정고시로 이어졌다. 장래를 보고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투자금을 하루바삐 정리하려고 주식으로도 모자라 가상화폐에 발을 디딘 것이 화근이었다. 여자의 급여까지 맞출 형편이 못 되었을 때는 동네가 텅텅 비게 되었다.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동네가 사라지는 데에는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돈 있는 치들은 미리 선점하겠다고 재개발 예정지에 가게를 차리는 호기와 배짱을 부렸지만, 대수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상품이 소진되는 데에는 삼 개월이 더 걸리면서도 물건값을 회수하는 데에는 일주일의 여신도 아까워하는 본사의 닦달이 고까워 사채에 손을 댔다. 안 그러면 편의점이 본사의 수중에 넘어갈 판이었다. 대수가 여자의 급여를 맞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여자의 아버지가 투병을 시작했다. 대수는 여자에게 밀린 월급 대신 생활비를 대주는 관계가 되기로 했다. 여자는 대수의 결정에 침묵했다. 여자의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던 날, 대수는 이틀 밤을 여자와 함께 뜬눈으로 보냈다. 여자의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대수는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깨달았다. 대수는 아버지에게 못다 한 사랑을 장인어른에게 바치겠다고 말했다. 가족을 집착의 도구로 삼지 않겠다, 오직 희생으로만 가족을 이루고 싶다는 대수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몰랐던 희생정신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여자에게 말하려다 말았다. 아버지처럼 죄를 짓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약속을 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술수였다. 대수는 여자의 아버지를 부지런히 간호했다. 여자의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깨어나던 날 밤, 병실 복도에서 여자는 자신이 결혼을 결정하는 거라고 말했다. 대수는 여자의 손가락에 시장에서 산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들은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침묵이 잦고 길어지던 그들 사이를 희아가 비집고 들어섰다. 희아를 임신했어도 대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가 아버지 몰래 건물을 담보로 사채를 갚아주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아버지는 사채업자보다 더 독하게 협박했다. 대수는 아버지의 돈을 갚지 못해 부모포기각서를 쓰고 말았다. 상속포기까지 포함된 각서를 쓰면서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대수에게 가족은 고리대금업자였다.

돌아서던 대수의 주머니에 봉투를 찔러 넣고 줄행랑을 치던 매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인터넷에서 최저가로 주문할까 고민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이 돈을 빼앗기지 않는 것만이 예의일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상대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슴인형을 둘러메고 개선하는 것만이 답례일 것이리. 함지박 만하게 입이 벌어질 희아가 떠올랐다. 그제야 피가 도는 것을 느꼈다.

대수는 세 번째의 인형가게에서 루돌프인형과 사슴인형을 번갈아 만졌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다 사버릴까? 입이 안 다물어져서 당분간 잔소리는 안 듣겠지. 대수는 빈손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희아보다 더 예쁜 사슴인형은 보이지 않았다. 인형가게를 들락날락할 때마다 피웠던, 매형이 찔러준 담배도 두 개비만 남았다.

삼 년 전이었던가? 희아가 할아버지를 봤다고 말했다. 아무리 저승사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라지만, 그런 생각이 난데없이 치미는 통에 대수는 화가 치밀었다. 그래도 희아를 위해서라면,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때 대수는 희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아버지를 기억해? 희아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냥, 아빠는 할아버지의 자식이 돼서 뭘 그런 걸 물어? 제 엄마의 품으로 달려가는 희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눈치 빠른 아내는 대수가 신체포기각서를 쓸 날이 머지않았다는 걸 진작부터 알았을까? 대수는 뜬금없는 생각을 털어내려고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며 인형가게로 들어갔다.



손자놈 안겨주면 해결해 주지. 네놈 고깝고 고깝지만. 그것도 복에 겨운 줄 알아라. 아비가 된 주제에 자식놈한테서 떡고물이라도 바란다는 게 나중에라도 부끄러워지겠지.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었다. 돈을 빌려달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함을 지르던 아버지가 소름 끼쳤다. 일어서는데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했다. 아무도 대수를 잡아주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다리가 저렸고, 핏대가 섰다. 엄마는 대수의 시선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엄마는 너무도 먼 데 있었다. 엄마는 이제 더는 지원군이 아니었다. 건물을 담보로 낸 빚만 제대로 갚았어도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엄마가 그리웠다. 지하 단칸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면 아버지에게 이 할의 이자를 포함한 원금을 면해달라는 간청밖에 도리가 없었다. 장인어른의 병명은 간경화였다. 그 흔한 생명보험 하나 들지 못할 정도로 아내의 가족은 가난했다. 처남은 대수에게 빚을 갚아달라며 지하 단칸방의 몇 푼 되지도 않는 보증금까지 손에 넣으려고 난리였다. 아들 낳으면 또 그러실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 판검사 만들어서 오라고! 아버지한테 무릎 꿇은 내가 미친놈입니다. 그래요, 나는 아버지 말마따나 돈에 미쳐서 부모도 다 팔아먹었지만, 아버지는 날 제대로 지키기나 하셨나요?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다 아버지한테 문전박대당하는 꼴을 넌더리 나게 반복하다…….

아버지가 던진 재떨이가 거실의 장식장 유리를 깨트리는 소리를 들으며 대수는 다시 경련을 느꼈다. 엄마가 아버지 몰래 모은 돈으로 파산을 신청하는 데 쓰라고, 희아 옷 한 벌 값이라고, 식도 올리지 못한 채 발목 잡혀 사는 아내의 그림자 값이라고 날라다 주었지만, 그 돈을 병원에다 갖다 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울지 않았다. 돌아서며 어깨라도 들썩거릴까 돌아봤어도 아내는 바윗돌 같았다. 아내는 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여기는 것이 대수가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대금 결제하느라 처남에게서 융통한 카드빚에다 보증 빚을 갚지 못했다. 처남은 신용불량자가 되느니 감방 가겠다고 협박했다. 파산신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산을 신청할 만한 근거를 부풀릴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신청하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상담을 듣고는 포기했다. 희아 때문이라고, 자식 볼 낯짝은 가져야겠다고 말했을 때 아내는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내를 등 뒤로 대수는 소리 죽여 울었다. 파산이 접수되지 않아서 고마웠고, 다시 파산을 신청할까 무서워서 울었다. 처남의 빚을 갚았다는 아내의 말에 또 울었다.

삼 년의 불임은 지루했다. 아내는 셀로판테이프 같은 사진을 내밀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도 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은 더 사라졌다. 아들일까 딸일까, 그것만 궁금했다. 병원과 클리닉을 들락날락하느라 빚까지 졌다. 유감스럽고 불행하게도 감히 아비를 꿈꾸었다. 대리운전에다, 주유공에다, 과외까지 하면서 작년 가을을 버텼다. 오직 또 한 명의 자식에게 아비가 되겠다고 악착을 떨면서.

한 달 전, 모처럼의 휴일을 맞아 술을 마셨다. 부모와 상속을 포기한다는 각서가 반려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나 상상이 지겨웠다. 아버지를 만날 용기도, 누나들을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끼로 패덕을 저지를 치밀한 구석도 없는 자신이 대견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음주운전을 하지도 않았으리. 대리운전사를 부르고도 푼돈이 황금처럼 느껴졌다. 집요하게 울어대는 전화기를 끄고 시동을 걸었다. 직진하려는데 멀리서 단속을 알리는 불빛이 보였다. 비보호좌회전을 하다 직진 차량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름 단속지대를 훤히 꿰고 있다는 운전경력을 과신했다. 단속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며 방심했다. 희아가 배를 싸매고 땀을 흘리던 제 엄마를 대신하여 아빠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던 시각, 대수는 응급실에 실려 갔다. 대수는 응급실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구치소로 향했다. 타박상을 입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경찰의 말에 대수는 차라리 영영 사라지는 게 나을 뻔했어요, 조금만 더 속도를 냈더라면, 하고 중얼거렸다. 경찰은 대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이가 유산이 될 뻔했던 이야기를 구치소에서 전해 듣던 그날 밤, 더는 누구를 위로할 용기가 없는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졌다.

다시 통증이 몰려왔다. 그때의 사고로 통증은 더 심해졌다. 대수는 치료를 거부했다. 이제 아이가 태어난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다. 아비처럼 당하지만 말아라. 네 할아버지의 염치없고 야박한 심성을 빼다 박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어깃장을 참아주겠다. 대수는 통증을 참느라고 어금니가 빠질 것 같았다.

신체포기각서보다 출생신고를 쓰는 날이 먼저 왔으면 좋겠다고 대수는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사슴 한 마리 내어달라고 읍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네 번째의 인형가게로 나서려던 대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대수는 왼손으로 루돌프인형을 잡으려다 오른손으로 기어이 사슴인형을 집었다. 희아가 좋아하는 초록색 포장지로 휘감아서 품에 안았다. 봉투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빼내는 손이 떨렸다. 그 돈이면 신체포기각서를 하루 더 연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할의 이자를 자식에게 붙이는 아비가 아니다. 부모포기각서를 쓰게 하는 아비가 아니다. 단지 딸이 원하는 사슴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어릴 때 가지지 못했던 루돌프인형을 고르려던, 그야말로 질 나쁜 아비일 뿐이다!

"따님이 무슨 색깔을 좋아하는지도 다 아시고, 참 자상한 아빠네요."

점원이 포장지를 싸면서 웃었다. 진열장을 차고앉은 인형이 죄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것 같았다. 돈을 빌릴 때마다 진열장의 인형처럼 친구들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휴대폰이 요금미납으로 발신이 정지되었을 때에야 대수는 친구에게 전화 걸기를 멈추었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산부인과의 우려를 잇속 차리려는 상술이라며 역정을 냈다. 세균 없는 집이 가장 안전하다는 아내의 말에 대수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직장을 알아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만 대답했다. 희아는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 간 것을 몰랐던 벌로 사슴인형을 사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대수는 물었다. 사슴이 예뻐? 희아가 눈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세상에나, 사슴이 예쁘냐고 묻는 사람도 다 있네? 아이는 예뻐? 하고 묻는 것하고 똑같잖아. 아빠는 희아가 안 예쁘지?

대수는 가게를 나오면서 마지막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온통 캐럴송이 들리던 시장의 손수레 앞에서 어린 대수는 루돌프인형을 사달라고 졸랐다. 아버지는 사내가 무슨 인형이냐고 윽박질렀다. 대수는 캐럴송보다 더 크게 울면서 시장바닥을 뒹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갔다.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은 엄마였다. 그때 대수는 루돌프인형과 아버지를 바꾸고 싶어서 엄마를 졸랐지만, 엄마도 루돌프인형은 사주지 않았다. 배시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마 만에 웃는 걸까. 담뱃불이 필터 끝에서 대수의 입으로 옮아붙었다. 대수는 금세 화난 얼굴이 되었다.



대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류장이었다. 아홉 시 뉴스를 알리는 알람이 버스정류장 티브이를 통해 들려왔다. 대수는 잠시 멈칫했다. 이십 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낯익은 버스가 멈춰 섰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버스였다. 오를까 말까 고민했다. 그 집에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랬더라면 찰나였을 것이다, 모기에 쥐어뜯기는 한순간처럼. 버스는 찰나처럼 시야를 벗어났다.

밤낮없이 벌어도 생활비는 모자랐다. 아내는 짜증을 부리는 대신 대수가 벌어온 돈으로 차곡차곡 빚을 갚았다. 아내가 마트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생활했지만, 늘 턱없이 모자랐다. 두 달째 사채를 못 갚아 이자가 원금을 추월하던 때였다. 대수는 아내에게 고백하려 했지만, 임신했다는 말에 입이 얼어붙었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워크아웃을 신청하려고 아내가 서류를 꾸몄다. 남의 돈 거저먹지 말라는, 그러다가는 천벌 받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대수는 아내를 면박했다. 발버둥을 칠수록 진창으로 빠졌다. 대수는 작심하고 그 버스를 올라탄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생일날이었다. 독립한 뒤로 엄마의 생일을 한 번도 건너본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생일날을 챙긴 적은 없었다. 용서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치기가 올라왔다. 대수는 담배를 끊은 뒤로 아버지가 입에 달고 다닌다는 과자 꾸러미를 대문 안으로 밀어 넣고 돌아섰다.

대수는 지하철역까지 걸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꿈을 꾸었다. 정장 차림의 대수는 인형가게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슴이 가게 유리문을 깨고 도망쳤다. 사슴은 붉은 코를 한 루돌프로 변신했다. 대수는 루돌프를 쫓았다. 죽을힘을 다해 쫓았다. 루돌프가 멈추었다. 대수는 숨을 몰아쉬며 루돌프에게 다가갔다. 넌 내 딸의 인형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대수는 루돌프가 되었다. 희아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잔망스럽게 선물꾸러미를 짊어진 채 루돌프, 가자! 하면서 대수의 등에 탔다. 대수는 자신은 루돌프가 아니라 아빠라고 말했지만, 딸은 듣지 않았다.

목적지를 알리는 방송에 대수는 눈을 떴다. 문이 닫히려는 사이를 뚫고 황급하게 뛰어갔다. 대수는 지상으로 올라왔다. 퍼붓는 비는 발목까지 차올랐다. 물이 정강이에 차오를 때는 소름이 돋았다. 지하 단칸방이 물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은 아니었다. 그제야 사슴인형을 지하철에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정말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까 싶었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라는 사채업자의 협박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지만 희아의 눈물보다는 영화 같지 않았다. 대수는 어떻게 변명할까 궁리했다. 희아를 설득할 다음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너무도 극적인 단 한 장면을 떠올리느라 평생을 고민하고 창작하지 못하는 좌절에 사로잡힌 작가들의 괴로운 표정을 지어보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그냥 묻힐 죄가 아닌가. 무감각해지는 자신이 파렴치하게 느껴졌다. 대수는 빗속을 걷고 또 걸었다. 저지대에 이르렀다. 밀려드는 물을 퍼내느라 분주한 사람들과 거대한 웅덩이가 되어버린 곳곳에 멈춰 선 차들이 얽히고설켰다.

대수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무심히 걷고 또 걷다가 진동음을 느꼈다. 큰누나의 가게에 들어서는 골목에서 직원을 구한다는 벽보에 홀려 무턱대고 귀청소방이라는 데 난생처음으로 기어들어 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CCTV가 있었다. 두꺼운 방화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 보인 안내문의 지시에 따라 인터폰을 눌렀다. 사레들려 기침하며 면접 보러 왔다고 말한 다음에야 문이 열렸다. 입구에 들어서는데 퀴퀴한 냄새와 낮은 조도, 고시원처럼 좁은 문들이 중앙 복도에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대수는 유사성행위업소라는 걸 알았다. 이력서도 내밀지 않았는데 내일이라도 출근하겠냐는 귀청소방 사장의 말에 머뭇거렸다. 아내의 출산일 이후로 출근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려다 말고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잔소리꾼인 희아는 아빠의 직업을 궁금해할 것이다. 대수는 마땅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했다. 큰누나의 가게 근처여서 안 들킬 자신도 없는 데다가 눈치 없이 떠들고 다닐 입방정을 생각하니 시간 낭비인 양 여겨졌다. 귀청소방을 나오려는데 사장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면서 벽마다 걸려있는 음화들을 봤다. 잊었던 욕정이 치 떨리게 돋아났다. 대수는 지하를 빠져나오면서 제 따귀를 갈기며 중얼거렸다. 염치가 있어야지! 건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내일부터라도 출근하겠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낯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어서 맥이 풀렸다. 얼떨결에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다.

"요즘 우리집 객들이 월세가 계속 밀려. 밀린 월세 받으라고 앉혀놓은 관리자는 영 신통찮아. 게다가 내 전화를 죄다 피해. 괘씸해서 첫째가 최신형 휴대폰을 사주기에 번호 하나 더 만들었지. 모르는 번호라서 그렇다 쳐도 목소리까지 잊어버려? 잊어버릴 게 많아서 배부르겠다. 내가 황천 가도 안 올 모양이구먼. 세상에 흔해빠진 못나고 못난 놈. 그 흔해빠진 놈보다 더 못나고 못난 놈. 울 손녀딸은 네 꼴 안 닮고 지 에미만 빼다 닮아야 할 텐데. 희아처럼 어찌 그리 눈이 똘망똘망한지, 거참."

초음파 사진으로 둘째가 아들이라고 확신했어도 대수는 웃지 않았다. 아내도 대수처럼 아들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아버지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비밀이었다. 그런데 딸이라니. 현대과학도 거짓말을 하다니. 대수는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지만,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대가 끊어지면 어떠랴, 요즘 세상에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떠랴, 남녀평등을 넘어 사람 자체가 존귀한 시대에 닥치고 존중을…… 이라는 말이 노인네의 입에서 나오는데 실감이 안 갔다. 희아가 맞았다. 희아는 뱃속의 제 동생을 두고 한 번이라도 누나라고 하지 않고 언니라고 했다. 희아가 옳았다.

"네 에미가 알리지 말라고 악 쓰더라. 그게 괘씸하기도 하고, 또 나보다 늦게 알았다고 상심할 네놈 생각하니 입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있어야지. ……지금 병원이다. 한 이틀 빠르다던가. 네놈보다 내가 먼저 봤다니까 기분이 어떠냐? ……그래, 며, 며늘애에다가 고 올망졸망한 희아 전화만 아니었으면…… 하여튼 징그럽게 못나고 못나서 초가삼간 다 태울 놈!"

아버지가 며느리라는 말을 처음으로 입에 올렸다. 아내가 대수 몰래 아버지를 만난다는 걸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긴밀할 줄은 몰랐다. 근본 없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대가 끊기게 생겼다고 윽박지르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심술에 바짝 독기가 품어졌지만, 한 마디도 내지르지 않았다. 팔뚝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빗물이 휴대폰을 걸머쥔 손등을 적셨다. 대수는 주저앉았다. 그래, 실컷 울어보자. 도시가 수몰되기에는 부족한 빗물이다. 도시가 완전히 잠기도록 눈물이라도 보태주자. 아버지가 뭐라고 떠들어대는데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대수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물은 금세 무르팍까지 차올랐다. 대수는 뛰다 넘어졌다. 얼굴이 물에 잠겨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뒤집어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슴이 떼를 지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대수는 눈을 비볐다. 거듭 눈을 감았다 떴다. 루돌프는 사라지고 없었다. 일어나서 고함을 질렀다. 택시! 소용이 없었다. 도로는 물에 잠긴 차들로 얽히고설켰다. 지하철역은 통제되었다. 버스와 차를 버리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지하철역에 가로막힌 사람들로 거리는 넘쳐났다. 대수는 떠도는 사람들과 차량 사이를 비집고 달렸다. 달리다 무엇인가에 부딪혀 미끄러졌다. 일어서서 다시 달렸다. 그러면서 내일이면 분실물센터에 가서 사슴인형을 찾아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도시는 점점 물에 차올랐다. 근육이 뭉치고, 숨이 막혀도 멈춰지지 않았다. 한여름인데, 물소리밖에 들리는 게 없는데 그 틈을 타고 희미하게, 세상 가장 작은 목소리로 캐럴송을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는, 너희는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온 존재들인가.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와선 고이고, 고여서는 아래에서 위로 차오르는 물이 더러는 도시발달과정을 방해해도 지금 나는 지켜야 하는 가장 무거운 단 하나의 무엇은 빼앗길 수 없다. 대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물속을 떠돌아다니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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