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의 월요논단] 문명 전환기, 空에 길을 묻다

[김영호의 월요논단] 문명 전환기, 空에 길을 묻다
  • 입력 : 2021. 03.15(월)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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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눈앞에 이전과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지식사회 일각에서는 오늘의 상황을 '4차산업혁명'의 시대라 부른다. 그러나 산업기술 위에 세워진 작금의 혁명 기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 인류 앞에 펼쳐지는 변혁의 상황은 보다 총체적이다. 근대의 기계론적 과학 문명은 물질적 부와 편의를 안겨 주었지만 현대인들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는 병들고 쓰레기로 넘쳐나며 인간의 삶은 피폐의 도를 넘어섰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일부 지식인들은 작금의 상황을 '문명사적 전환기'로 고쳐 부르고 있다.

새로운 변화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야기한 팬데믹이다. 전 지구적인 재앙 상황은 각국에 세계관의 변화, 즉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세계 10대 경제 대국의 반열에 들어선 나라, 고난한 민중 항쟁을 거치며 정치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다. 하지만 OECD 최고의 자살률과 산업재해 사망률, 역대 최고의 저출산율과 참담한 청년 행복지수를 나타내는 통계청의 지표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경쟁과 성과주의가 야기한 '피로사회'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소리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문명사적 전환기에 대응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에는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없다.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자진 선택하는 '신생활운동'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생태계 실천 운동인 '녹색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예술의 영역에서도 인간의 존재에 대해 치열하게 성찰하는 작품들과 전시회들이 대세다. 이러한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근대의 경쟁과 성과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다. 이른바 기계론적이고 분석적이며 사변적이고 물질적인 문화가 쇠망해 가고, 시스템적이고 종합적이며 직관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의 문화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시기에 이 모든 문화현상을 품으며 떠오르는 대안이 불교의 공(空) 철학이다. 공은 대승불교의 기본 개념이자 반야심경의 중심 개념으로 국내외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는 사상이다. 불교학자 서정형은 공을 '지혜의 눈으로 보는 세상의 참모습'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공이라는 그물코를 잡아당기면 무아(無我)와 무상(無常)과 연기(緣起)와 열반(涅槃)과 마음이라는 그물코가 모두 끌려온다'고 역설하고 있다.

공은 허무가 아닌 자유를 지향한다. 서정형의 말처럼 공하다는 것은 자성(自性), 즉 사물 자체의 본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자기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고 변하며 독립자존 하지 않아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물이 변한다면 그것은 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고, 인연이 화합되어 존재한다면 그것도 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사물은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고, 좌절할 일도 없다는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로 불리는 작금의 인생 노정에 공 철학이 대세로 다가오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눈이 새롭게 열리고 있다.

<김영호 중앙대학교 교수·한국박물관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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