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지명에서 제주선인의 예지를 엿보다

[문영택의 한라칼럼] 지명에서 제주선인의 예지를 엿보다
  • 입력 : 2021. 06.01(화)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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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선인들은 마을 이름에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 지형의 특이함을 반영하거나, 미래에 나타날 현상을 예언하거나, 바람을 실기도 했을 것이다. 필자의 고향 구좌읍 행원리의 옛 이름은 어등포(魚登浦)이다. 포구를 유영하는 물고기를 갯가로 올리게 할 만큼 바닷바람이 드센 마을 특성을 반영한 이름으로, 전국 최초로 들어선 행원풍력단지가 이를 증거한다. 반면 지금의 행원(杏源)리는 현재보다 미래에 구현될지도 모를 이름이다.

제주국제공항과 인접한 도두(道頭)동은 길에 관한한 으뜸 마을이 됐다. 섬머리 마을로도 불려지는 도두동은 육로·해로·공로가 있는 전국 유일(?)의 마을이다. 외도(外都)동은 탐라 천년 도읍인 제주시 외곽에 있는 마을로는 최대의 도시가 됐다. 도련(道連)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러 마을들을 연결하는 중심 마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위에 소개한 세 마을의 또 다른 공통점은 제주의 다양한 역사문화를 품고 있다는 점이다. 외도1동·외도2동·내도동·도평동을 아우르는 외도동은, 탐라 천년 도읍지인 제주목관아 밖에 있는 고을의 의미를 지닌 마을이다. 도근천(都近川) 서안에 있는 월대(月臺)는 선비들이 노닐던 곳이다. 월대는 대궐의 경승지를 이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고려시대 건립된 탐라3대 사찰 수정사가 있던 절물공원에는 지금도 맑은 물이 솟고 있다. 한때 도평대리로 불리기도 했던 도평동 사라마을에는 탐라3기(김만덕·어승마 노정)로 불렸던 혜일스님이 고려말에 거처했던 서천암이 있었고, 또한 용동과원이 있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거치며 해안마을과 산간마을을 연결하는 도련에서는 오래전 지석묘와 신석기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또한 수령 200년이 넘는 감귤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래된 과수원도 있다. 4·3위령비가 건립된 본향당에는 300년이 넘는 팽나무와 푸조나무가 할망당 주변을 신령스럽게 덮고 있다. 4·3광풍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령비에 새겨 당팟개당이라 불리는 할망당에 모시고 있으니, 제주도에서 4·3의 고혼을 본향당에 모신 곳으로는 어쩜 이곳이 유일하다.

도두1동·사수동·신성마을·다호마을 등으로 이루어진 도두동에는 바닷길과 하늘길과 더불어 용천수 길도 있다. 널따란 마을광장 주변으로 형성된 다섯 갈래의 길인 오방으로 흘러간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 오래물이다. 바닷길과 하늘길을 확연히 감상할 수 있는 도두봉에는 25봉수대 중 하나인 도원봉수가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구축한 정뜨르 비행장을 엄호하려 산을 파헤친 진지 갱도들도 있다. 제주4현으로 불리는 이미가 1401년 유배와서 훈학을 펼쳤던 도두동은 1444년 전후 문둥병이 창궐하자 목민관 기건 목사가 구질막(救疾幕)을 설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기건목사는 바다에서 전복을 따는 잠녀들의 고통을 보고는 '내 밥상에 전복을 올리지 말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제주를 떠날 때 사람들이 몰려와 부모와 이별하듯 슬퍼하였다 전한다.

여러 마을들을 거닐며 지명에 실린 다양한 특성과 선인들의 삶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들이 있음에 오늘 우리가 있다. 연기사상(緣起思想)은 우리들을 숙연하게 해 다음에 올 후세들을 생각하게 한다. 이 또한 마을 기행에서 얻는 기쁨이리라.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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