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제주 마을탐방] (9)제주시 애월읍 중엄리

[2021 제주 마을탐방] (9)제주시 애월읍 중엄리
제주바다 원형 간직한 제주다움 지켜가는 마을
  • 입력 : 2021. 11.15(월)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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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의 역사 간직한 ‘엄쟁이’라 불린 마을
청년들 힘자랑하던 ‘듬돌’ 장사의 전설 품은 곳
마을 본향당 ‘송씨일뤳당’ 정성 모아 건물로 단장
건강장수마을 선정… 건강센터 교류의 징검다리




바닷가의 풍경이 말 그대로 절경이다. 사시사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애월해안도로를 따라 갯바람에 얼굴을 비비며 걷다 보면 나그네의 발걸음은 어느새 중엄리에 가닿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갯바위와 해풍에 맞서 우뚝 치솟은 해안절벽을 마주하면 이 섬이 먼 옛날 펄펄 끓어오르며 바다를 뒤덮었던 용암의 결정이 켜켜이 쌓여 산과 들을 이룬 곳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제주바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엄리의 뒤안길에는 어떤 내력이 숨겨져 있을까?

중엄리 전설지 조배기돌

용천수 새물

중엄리는 신엄리, 구엄리와 함께 엄쟁이라고 불리던 마을이다. 옛사람들은 구엄리를 묵은엄쟁이, 신엄리를 새엄쟁이, 중엄리를 중엄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세 마을의 이름인 엄쟁이의 뜻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널리 알려진 해석으로는 이곳이 제주에서도 돌염전으로 유명했던 마을이어서 소금을 뜻하는 한자어 염(鹽)이 엄으로 변했다는 말이 있다. 이와 달리 언어학자들은 벼랑을 뜻하는 제주사투리 '엉장'에서 엄쟁이로 발음이 변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마을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서는 420여 년 전 고씨와 양씨 일가가 정착하며 오늘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견해가 모아진다. 고씨와 양씨들은 '대섭동산'이라고 불리는 곳에 정착한 이래 인근 마을이 구엄리와 수산리 등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규모가 커지며 대촌(大村)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한다. 17세기의 기록은 남사일록에 엄장포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동시대의 지도인 탐라지도와 제주삼현도에도 등장하고 있어서 400년이 훌쩍 넘는 마을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리사무소에 있는 듬돌

중엄리본향 송씨일뤳당

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중엄리에는 다양한 역사문화자원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우선 리사무소에 들어서면 공룡알을 닮은 둥글둥글한 바윗덩이들이 눈에 띄는데 이 마을의 옛 어른들이 체취가 밴 듬돌이다. 애초에 이 돌들은 마을의 구엄리로 통하는 마을 중심가인 '묵돌항' 인근에 있던 것이다. 알다시피 듬돌은 청년들이 힘겨루기 시합을 하는 도구로 이용되곤 했는데 마을에 따라서는 이 돌을 들어 올릴 수 있어야 어엿한 어른으로 인정받는 이니시에이션의 상징이기도 했다.

묵직한 듬돌이 청년들의 힘자랑을 했던 것이라면 중엄리 바닷가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들어 올릴 생각조차 못할 정도의 바위를 내던진 장사의 전설을 품은 곳이 있다. 이른바 '마두령과 조배기돌'이라는 전설로 전해져 온 이야기인데 그 사연을 간추리면 이러하다.

설촌유래지 대섭동산

리사무소에 있는 마을 고문서

마두령은 중엄리 해안에 자리한 바다 기슭 일대를 이르는 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에 신비한 선인(仙人)이 살았는데 마두령에서 수제비를 먹으며 바다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호랑이가 자신의 말을 덮치려들자 수제비 한 덩어리를 내던졌는데 그것이 워낙 커서 호랑이와 말이 한꺼번에 죽고 말았다. 그때 내던진 수제비 덩어리는 바다에 빠진 채 굳어 커다란 갯바위로 변했다. 이 바위를 수제비를 이르는 제주사투리인 '조배기돌'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중엄리 바닷가에 가면 집채만 한 조배기돌과 만날 수 있다. 조배기돌 인근의 바다 기슭의 절벽과 갯바위들은 조배기돌에 맞아 죽은 말과 호랑이를 바위들이 있어서 전설 속의 이야기를 실감케 만든다. 근래에는 바닷가의 절경에 취해 수많은 여행자들이 찾아드는 명소로 알려지고 있으며 해안도로 건너편에 옛 전분공장을 리모델링한 카페도 대단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또한 조배기돌 지척에는 옛날 중엄리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던 새물이 있다. 새물과 가까운 대섭동산이 이 마을의 설촌지인 것을 보면 이 용천수는 설촌 이래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중엄리 사람들에게는 생명수나 다름없는 귀한 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엄리는 전설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여느 마을처럼 신성한 힘을 빌려 마을공동체의 안락을 도모했던 신앙의 메카도 있다. '송씨일뤳당'이라고 불리는 중엄리본향당이 그 주인공이다. 애초에는 노천에 담장을 두른 모습이었으나 근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건물로 변신했는데 들머리에는 제주의 당이라면 으레 신성의 상징처럼 서 있는 웃자란 팽나무가 있다. 송씨할망이라고 불리는 중엄리본향당신은 구좌읍 송당리본향당의 금백조와 소로소천국의 후손 중 하나라고 알려진다.

고재만 이장

이처럼 중엄리는 옛사람들이 일궈온 자취와 오늘날에도 그것을 이어가는 마음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데 2000년대 들어서서 가속이 붙은 개발과 인구 인입으로 마을 정체성이 쇠락해가는 국면에 처해 있다. 이 때문에 중엄리 고재만 이장은 적잖은 고민을 떠안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재만 이장은 오랜 역사를 이어온 마을의 정체성 쇠락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며 여러 가지 사업을 실행하는 중이다. 2021년 현재 770여 명의 인구 중 외지인이 50% 넘는 상황이라 무엇보다 마을 화합을 위한 일에 부심한다고 한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지정한 건강장수마을로 선정됐습니다. 덕분에 지방정부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게 됐는데 그중 한 가지가 노인회관 2층에 마을건강센터를 만드는 일입니다. 건강센터가 완공되면 그 공간을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이용하며 다양한 교류를 이어가는 징검다리로 삼을 생각입니다. 그보다 앞서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진행하는 청년회관 리모델링도 같은 취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뿐이 아니다. 마을의 설촌지로 알려진 해안가의 '대섭동산'에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는 거점으로 삼겠다는 구상도 진행 중이다. 애월읍 차원의 지원을 받아 3개년의 계획을 세운 고재만 이장의 구상이 공염불이 아니라는 증거가 이미 리사무소에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백여 년 동안의 마을 문서 영인본 전시부스를 만들어 내외에 공개하고 있으니 장차 들어설 마을박물관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포제를 비롯한 각종 마을제사를 기록한 입의(立議)를 비롯해 마을의 대소사 때마다 소용했던 물품과 금전을 꼼꼼하게 기록한 절목(節目) 등 문서들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자못 큰 것으로 보인다. 묵향 짙은 고문서 속에 오롯이 새겨진 옛사람들의 마을사랑이 이렇게 깊다면 그들의 유지를 떠받들어 마을의 전통을 지켜가려는 고재만 이장 또한 그 못지않은 애향심이 있으리라. 하루가 다르게 제주다움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 중엄리가 마을 전통을 꿋꿋이 지켜가는 곳으로 굳건히 자리 잡기를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글·사진=한진오(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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