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에 설렜던 기억은 유년 시절 접한 다채롭고 알록달록한 만화 영화들에서 시작됐지만 처음으로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매혹되었던 것은 17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아마도 살면서 가장 많이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갔었을 그 시절에는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극장으로 향하곤 했다. 영화 감독을 꿈 꾸었던 것은 아니지만 매혹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없기에 그저 좋아서라는 거대한 덩어리 하나로 마음을 뭉친 채 교복을 입고 극장 의자에 앉아 밤이 올 때까지 스크린을 쳐다보곤 했다. 당시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또렷한 것은 여러 명이 앉아서 거대한 스크린을 바라보던 동시의 경험이다. 낯선 옆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자주 같이 웃었고 때론 함께 울곤 했다.
그 시절이었다. 나는 어떤 영화의 본편이 끝난 후 정박된 자세로 검은 스크린의 하얀 글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생에 첫 경험을 한 적이 있고 그 실감은 여전히 생생하다. 강렬했던 영화의 본편 후 검은 스크린에 마치 별처럼 내려오던 길고 긴 크레딧. 감독이나 배우, 스탭의 이름이 아니라 낯 모르는 누군가의 이름과 이름들이 꼬리를 물고 마치 행렬처럼 눈 앞에 보여졌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엔딩 크레딧이다. 전태일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람한 영화의 잔상이 짙게 스며든 그때 마음 속에 훅하니 들어온, 어떤 인물의 궤적을 필사 하듯 각인한 그 영화의 후원자들의 이름을 봤던 기억은 영화 만큼이나 놀랍고 강렬했다. 영화를 만든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전태일의 이야기를 세상과 함께 나누고 싶던 그 마음은 얼마나 뜨거웠던 것일까. 아마도 그 생각의 꼬리가 지금 나를 영화의 복판에 데려다 놓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1996년 박광수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한 지 26년, 명필름이 제작한 홍준표 감독의 애니메이션 '태일이'가 지난 12월 1일 개봉했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다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 희망의 불꽃이 됐던 청년 전태일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이 작품은 여전히 뜨겁고 맹렬하게 마음을 뒤흔든다. 전태일이 살았던 1970년대 초반, 극영화 전태일이 만들어진 1996년 그리고 지금 2021년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불평등과 차별은 여전하고 제 밥그릇 뺏길까 남을 곤경에 몰아넣는 손쉬운 선택들 또한 바뀐 것이 없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말티 순수한 학문적 환상이거나 거짓말인 시대는 작은 개인들의 희생을 연료 삼아 흘러가고 있다.
어떤 이야기는 여전히 반복 돼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태일이'는 평범하고 소박했던 한 청년의 꿈이 어떻게 영글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운동가나 열사 이전에 그저 타인의 끼니를 걱정하고 가족의 안위를 고민하며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는 영화는 인간 태일이의 그런 모습이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부당한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용기가 얼마나 당연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지금의 우리 또한 매일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50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50년 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외침은 다른 말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자는 제안이 고민 없이 묵살되는 시대에서 외침을 멈추지 않는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혹은 시대를 앞서간다는 외면 뿐이다. 인간의 심장에서 나온 올림을 기계적으로 차단하는 이들의 녹슨 심장은 어찌 그리 차갑게 식어 있을까.
'태일이'는 다시 말한다. 연대는 시대를 넘어선다고 그러므로 마음의 손을 잡는 것은 조금도 늦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태일이'를 본다는 것은 그 손을 잡는 일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함께 만들었던 후원자들의 연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태일이'를 만든 이들과 '태일이'를 통해 청년 전태일을 접하게 된 지금 태일이 나이의 관객들, 다시 전태일을 태일이로 마주하게 된 이들 모두가 시대를 뛰어넘는 연대의 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의 꿈은 그저 내일의 우리가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 기계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존중을 받는 것 뿐이었는데 그 어떤 이가 비단 전태일 뿐이라고, 그는 특별했던 누군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일이'를 보는 것은 알았던 사실을 재확인 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 영화가 복원할 마음들에 대한 연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