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18)아가, 봄이 왔다

[황학주의 제주살이] (18)아가, 봄이 왔다
  • 입력 : 2022. 01.11(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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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립니다. 내 경험으로 종소리는 오래된 순서대로 아름답습니다. 문득 가장 오래된 종소리를 듣고 싶은 시간, 가로등과 민가 불빛 속에 세 갈래 골목이 걸어가고 두 갈래 골목이 바다 옆으로 누운 동네 산책을 합니다. 고색을 띤 한 카페 출입문과 창문 사이로 젊은 커플들이 보입니다. 폭 삼사 미터 그쯤 되는 공간 안에 옛날 '우리' 사이의 짧은 시간도 가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밧줄을 당기는 달에 끌리며 골목 등빛을 따라 걸어가면 제주 흑돼지 다리로 만든 하몬을 파는 술집이 나옵니다. 그 앞을 외투 깃이 말린 남자가 지나갑니다. 마른 억새가 뜨락을 이룬 폐가의 담장에 덩굴식물의 앙상한 줄기가 조명을 받아 제법 미술적인 분위기를 냅니다. 올레길 돌담을 따라 신촌리 바닷가까지 가면 방파제 앞에 달팽이처럼 머리를 내밀고 보안등빛은 내려옵니다. 근처 촌집 주점의 협소한 우주에서 환호성을 울리는 사람들이 있고 볼륨이 싸악 내려가듯 일순(一瞬), 반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럴 때 선과 명암이 뒤섞인 한산한 골목에 알 수 없는 성(聖) 입구가 열립니다. 마치 곧 봄이 온다는 듯이.

임대물건으로 나와 있는 카페에서 남자가 나와 크고 흰 개를 데리고 팔자걸음을 하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카페라떼 향이 공기 중에 배는 듯한데, 낚싯배 한 척이 다가옵니다. 언젠가 제자들과 우도에 들어갔다 배가 끊어져 낚싯배를 불러 타고 나온 기억이 납니다. 물결이 방파제 아랫도리를 때리고 넘어오면 시간의 난간을 넘어 마음 안으로 침침한 불빛 속의 사람 하나가 철썩, 하고 떨어져 내립니다. 내게서 마른 건초 냄새가 난다고 했던 그녀는 참으로 신선하고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재봉틀을 돌리다 적막한 눈빛을 떨치지 못하고 갔습니다. 가난한 재봉사 앞에서 세상은 끝까지 조용했으며,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 두려웠습니다. 다시 바다의 물결은 출렁입니다. 더 이상은 달빛의 꼬리를 밟고 들어오는 배가 없을 듯합니다. 오늘 이 시간 외에는 아무도 만들 수 없는 신비감이 바다 주위 한적한 대기 속에서 빛납니다. 나는 입을 굳게 다뭅니다.

조천리로 가는 골목과 골목이 마주치는 십자로 한쪽에 감추어진 독립서점의 유리문에서 케테 콜비츠의 포스터를 만납니다. 안덕면에 있는 포도뮤지엄에서 지금 그녀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그림을 그렸던 그녀의 전시 제목은 "아가, 봄이 왔다" 입니다. '봄'이라는 단어 하나가 나의 미로를 다음 미로로 연결합니다.

어린 누군가 나에게 졸라대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골목을 빨리 알아봐 달라”고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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