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은 많은 화가의 주요 작품 소재다. 서양에는 알브레히트 뒤러, 렘브란트 등 옛 대가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 척 클로스 등 현대 작가의 자화상이 잘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도 조선시대 윤두서, 일제강점기 고희동, 현재 강형구 등의 자화상이 유명하다. 이처럼 시대·장소를 불문하고 자화상이 그려지는 이유는 그저 화가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화상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시대에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바로크 시대 네덜란드서 활동했던 유디트 레이스터의 자화상에도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1893년 루브르미술관이 구입했던 한 작품이 레이스터의 작품으로 밝혀지기까지 그녀는 미술사에서 잊혔던 화가였다. 그때까지 그녀의 작품은 네덜란드 초상화가이자 풍속화가였던 프란츠 할스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역사의 냉대와 달리 당시 레이스터는 젊은 시절부터 인정받는 화가였다. 24세에 네덜란드의 화가 길드 회원으로 뽑혀서 작품 판매 권리를 얻었고, 자신의 공방에서 남성 조수를 두고 작업했으며, 수강료를 받고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할스의 작품으로 오해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작품이 훌륭했다는 말이다.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스터의 이름이 미술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잊혔던 여성 화가들과 마찬가지다. 여성은 화가로 활동하기도 어려웠고, 화가로 이름을 남기기도 어려웠다. 레이스터는 당시 인기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에서 배제됐으며, 다시 조명된 이후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레이스터의 자화상이 의미 있는 이유는 여성 앞에 놓여있던 이런 불평등에 맞서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남성 화가들은 이젤 앞에서 손으로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신을 장인, 노동자가 아닌 상류층에 속하는 지식인으로 여겨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레이스터도 자신의 지위가 높아 보이도록 작업복 대신 목에 커다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그러나 레이스터는 남성 화가들과 달리 붓을 들고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자신을 표현했다. 이는 남성 화가들에게 자신이 화가임을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혼 후 레이스터의 작품 활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은 결혼 후 더 많은 제약이 여성에게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레이스터의 상황이 현재 제주도의 상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400년이 지났어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여성 작가가 결혼 후에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 힘들다. 최근 경력이 단절된 여성 작가의 작품 활동을 돕기 위한 움직임이 서울에서는 생겼다고 한다. 제주도도 여성 작가가 결혼 후에도 작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김연주 문화공간 양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