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건축을 만드는 일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주체로 놓고 건축을 매개와 중간항으로 인식할 때
어떠한 세계가 펼쳐질 것인가.
어떠한 여백이 보일 것인가.
어떻게 조화될 것인가.
반대로 어떤 대립과 복합이 일어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 이타미 준, '손의 흔적-돌과 바람의 조형' 중에서
[한라일보] 지난해 12월 6일 한경면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이타미 준(유동룡) 미술관이 개관했다. 하늘과 땅, 바람과 돌, 그 모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그의 철학은 건축에 문외한인 이들까지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하나의 건축물이 완성되기까지 과정을 보여주는 수많은 드로잉과 설계도면들은 전공자가 아니라면 다소 난해하게 다가올 수 있으나 도슨트의 설명 덕분에 차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귀화를 거부함으로써 평생 '경계인'의 삶을 살다 간 그에게 건축은 마치 자연과의 융화를 통해 모든 경계를 무화시키는 작업처럼 다가왔다. 그가 구축한 세계는 감동과 동시에 수많은 상념의 물음들로 이어졌다. 그래서일까 시선은 익숙한 건축물보다 그의 첫 데뷔작인 '어머니의 집'(1971)과 같은 초기작품들에 오래 머물다 '먹의 암(庵)'(1998)에 멈춰 섰다. 낡은 건물을 개축하려다 벚나무 두 그루를 위해 도면을 수정해 건축한 '먹의 암'을 상상하니 계절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벚나무와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는 사람이 그려졌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은 꽃봉오리가 터질 때, 꽃잎이 흩어질 때, 푸른 잎으로 가득할 때, 그 모든 순간을 목도할 수 있겠구나. 그러한 상상은 '집'이 주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되돌아왔다.
집은 단순히 '사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현대 사회에서 집은 지나치게 물질적 가치로 치환돼 그 의미가 자본에 변질된 것 또한 사실이지만 집은 최소한의 안전과 휴식이 보장되는 개인의 공간이자 가족 공동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기억과 흔적이 차곡히 쌓이면 집은 개인의 고유한 장소가 된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가장 기억에 남는 최초의 '방'과 물질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집'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집이란 세계 안의 우리들의 구석이다. 집이란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이며 그것은 정녕 하나의 우주이다"라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집은 개인이 영위하는 가장 작은 세계와도 같다. 지역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그 중심에 사람이 있는 이타미 준의 건축물은 그가 그러한 매개와 중간항으로써 건축을 인식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급변하는 사회, 개발을 명분으로 삼은 파괴가 만연한 시대이기에 집이 주는 본질적인 의미는 몽상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평화를 위한 회복의 시작점이 있다면 그 원천은 '가장 작은 세계', '집'에서 비롯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