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나, 혹은 모두의 자화상

[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나, 혹은 모두의 자화상
  • 입력 : 2023. 04.12(수)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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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스페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는 당대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그의 말년은 암울했다. 홀로 '귀머거리의 집'에 칩거하며 회벽 위에 그린 '검은 그림' 14점은 고야 특유의 화려하고 우아한 화풍은 사라지고 온통 기괴함과 우울감으로 채워졌다. 제목도 붙여지지 않았던 14점의 작품은 그가 죽고 40년이 지나서야 이름을 달고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그 그림들은 전쟁, 혁명, 종교 탄압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시대 상황을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광기와 탐욕,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극단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비단 시대의 초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 작품들은 일면 그 시대를 살았던 자신, 기회주의자이자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스스로를 반추하는 처절한 회한의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화가에게 자화상은 각기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물음이 강하게 투영된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평생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통해 표현한 렘브란트 하르먼스 반 레인처럼, 그리고 삶의 고난과 상실에 대한 위안이자 고통을 견디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그린 빈센트 반 고흐처럼 말이다. 모딜리아니가 눈동자를 그리지 않는 이유를 물었던 잔느 에뷔테른에게 '당신의 영혼을 다 알고 난 후에' 그리겠다고 대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이후에 그의 뮤즈, 잔느의 눈동자는 그렸으나 정작 죽기 전 딱 한 점만을 남긴 자신의 자화상에서 그의 눈은 검은 동공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자화상에서도 손에 팔레트를 쥐고 있듯이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많은 작품에는 그의 삶, 사랑, 고뇌 등 모든 것이 붓을 통해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림으로, 언어로 혹은 음률로 전달되는 모든 예술은 그를 표현한 예술가가 놓여있는 시대, 그곳에서 바라본 시선과 내면을 반영하기에 각기 다른 형식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의 기록은 그 시대의 자화상이 되고 각기 다른 문화와 전통은 그 나라의 자화상이 된다. 그러나 수백 년의 낙차와 거리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정서로 스며드는 작품들은 인간의 본성과 추구하는 삶의 본질이 다르지 않음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재의 폭력과 광기가 수백 년 전 그림 속에서 상기된다는 것이 못내 씁쓸하기도 하다.

과연 지금 우리 시대의 자화상은 어떠한 모습으로 기록될까. 75년 전 제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여전히 정당한 이름을 세우지 못하고 왜곡과 훼손을 반복하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참으로 비통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인간의 망각은 어김없이 폭력을 베껴 쓴다. 그럼에도 인간만이 할 수 있고 인간이기에 지켜야할 희망이 있다면 그 실마리는 연대에 있지 않을까.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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