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인생의 역사
  • 입력 : 2023. 04.21(금) 00:00  수정 : 2023. 04. 21(금) 16:48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파벨만스'.

[한라일보] 어린 시절에는 용돈이 생기면 책을 샀다. 아동 문학을 사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중학교 때부터는 영화 잡지를 사서 읽고 모으곤 했다. 용돈이 부족할 때는 책 대여점에서 빌려 봤는데 인기가 많은 책이나 잡지일 경우 대여 중인 경우가 많았기에 비디오 커버들을 보며 누군가로부터 반납되기를 기다리곤 했다. 그 시절에는 비디오와 책을 함께 대여하는 대여점이 많았다. 그러다가 보고 싶어 못 견딜 것 같은 영화를 발견하면 책 대신 비디오를 빌리고 비디오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원하던 책과 영화를 모두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시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었다. 그렇게 10대의 많은 시절을 책과 영화 속에 파묻혀 지냈고 40대가 된 지금의 나는 영화 산업에서 일을 하며 책 읽는 일이 가장 즐거운, 소설 창작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끌려갔던 순간들이, 나를 끌어당긴 매혹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운명이라고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작고 잦은 선택의 순간들이 나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 어린 시절 그렇게 매혹된 것들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되었다. 내가 세상을 보는 창, 세상이 나에게 건너오는 창이 여전히 내 눈앞에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자전적 영화 '파벨만스'는 파벨만스 가문의 샘이 어떻게 영화감독으로 자라났는지를 섬세하고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샘은 부모님과 함께 생에 최초의 영화로 '지상 최대의 쇼'를 극장에서 관람하고는 영화 속 장면에 사로잡힌다. 영화 속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장면의 아찔한 잔상을 잊지 못한 샘은 장난감 기차를 가지고 장면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반복하고 샘의 엄마 미츠는 그런 그에게 카메라를 건넨다. 샘은 미츠가 건넨 카메라로부터 그의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다. 샘에게 카메라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는 도구가 되고 샘은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빛나는 성취의 순간과 아찔한 절망의 순간을 모두 목도하며 그렇게 영화감독이 되어간다.

영화는 샘에게 세상을 비추는 창인 동시에 스스로를 바라보는 거울이 된다. 자신이 촬영한 화면을 편집하고 특수한 효과를 고안해 내면서 샘은 영화가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음을 그리고 자신 또한 영화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거침없는 몰입과 짜릿한 감탄이 그를 휘어 감으며 시네마 천국의 한복판에서 기쁨으로 충만한 순간, 그는 자신이 촬영한 장면들 속에 알지 않았으면 좋았을 세상의 비밀을 엿보게 된다.

'파벨만스'는 어린이부터 청년 시절까지의 샘 파벨만스의 삶을 따라가는 영화다. 위대한 감독 이전 한 인간이 어떻게 영화라는 매체에 매혹되는지, 어떤 가족 안에서 꿈을 키우며 성장하는 지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영화가 삶이고, 삶이 영화'라는 거짓말 같은 문장을 진실된 이야기로 완성해 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긴 시절 영화인으로 살았던 스티븐 스필버그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완성했다.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데뷔작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선보이는 것과는 다른 행보다. 1959년 첫 영화 연출을 시작으로 수십 편의 영화를 만들고 제작한 그는 '파벨만스'를 통해 담담하고 사려 깊게 인생의 역사를 되짚는다. 그는 자신이 영화와 사랑에 빠진 순간, 사랑에 빠진 이유, 사랑에 고뇌한 장면들을 떠올리고 사랑을 멈출 수 없던 마음과 사랑했기에 이겨냈던 고비들까지 영화와 함께한 모든 순간들을 정성을 다한 손길로 포개어 담는다. 누군가가 평생을 바쳐 사랑한 '영화'라는 '물질'은 그렇게 한 작품으로, 하나의 생명으로 생생하게 존재하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고 두 시간 반이 지나서 엔딩에 이를 때까지 샘은 여전히 꿈을 꾸는 청년이다. 아직 데뷔작을 내놓지 못했고 세상의 찬사 또한 받기 이전이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마주친 자신이 존경하던 거장 앞에서 영화의 비밀을 하나 간직한 채 또 한 번 사랑으로 도약한다. 이 사랑스러운 마지막 장면 후 엔딩 크레딧이 스크린에 떠오를 때 나는 자연스레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뜨겁게 사랑한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바친 영화를 여전히, 온전히 믿고 있는 이 사람의 순정이 너무 멋져서 그리고 관객으로 극장에서 마주한 이 영화의 순간들이 정말로 근사해서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오래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통해 기억하고 기록했다. 이 인생의 역사가 사랑으로 써 내려간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274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