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사랑의 경로
  • 입력 : 2024. 11.04(월) 04: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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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럭키, 아파트'.

[한라일보] 한 눈에 반하거나 서서히 스며들거나 사랑은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시작되기 마련이다. 사랑의 공평함이 근사한 이유다. 그런데 여전히 이 사랑의 평등함을, 그 눈부심을 비교하고 절하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의 사랑도 어떠한 종류의 사랑도 우위에 설 수 없으며 동시에 부정 당해서도 안 된다.

가을 국내 극장가가 무지개 빛으로 물들고 있다. 10월 초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도시의 사랑법'이 개봉한 뒤 8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끌어 모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없지만 사랑을 할 순 있겠지'(이하 '우천사')와 '폭설', '럭키, 아파트'가 연이어 개봉하며 각기 다른 사랑의 형태들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담쟁이'를 연출한 바 있는 한재이 감독의 '우천사'는 세기말을 배경으로 운명적인 첫사랑에 빠지는 십대의 두 소녀 주영(박수연)과 예지(이유미)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교내와 교문 밖에 각기 디른 형태로 존재하며 십대들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현실을 직시하는 '우천사'는 그 참혹함 안에서도 서로를 발견해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기를 힘차게 호명하는 작품이다. 윤수익 감독의 '폭설' 또한 십대 시절 첫사랑에 빠지는 수안(한해인)과 설이(한소희)의 이야기다. 배우 지망생 수안은 아역 배우 출신의 스타 설이를 만나게 되고 요동치는 감정의 실체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배우가 된 수안은 설이를 찾아 그들이 한때 함께였던 겨울의 바다를 찾아간다. '우천사'와 '폭설' 두 작품 모두 십대 시절의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공들여 섬세하게 그려낸다. 평범하지 않은 이 감정이 비단 동성 간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만이 아니라는 것을 두 작품 모두에서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태원', '우리는 매일매일'등의 다큐멘터리를 선보였던 강유가람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럭키, 아파트'는 첫사랑의 시점에서 꽤 긴 시간이 흐른 뒤 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커플의 이야기다. 온 힘을 다해 마련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선우(손수현)와 희서(박가영)는 9년 차 레즈비언 커플로 사랑의 낭만이 희미해진 둘의 자리에 미래를 위협하는 불길한 조짐들이 피어 오른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둘의 밖에서 안으로 침범해 오기도 한다. '럭키, 아파트'는 지금 이 사회에서 사랑의 숙성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천사', '폭설' 그리고 '럭키, 아파트 세 편의 작품들은 장르상 독립 영화, 드라마나 멜로 또는 퀴어로 분류돼 카테고리화 될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는 퀴어라는 장르가 사라질 날도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래도 이 사랑들이 이만큼까지 왔다는 것, 긴 시간 거친 길을 지나 극장의 스크린에서 함께 사랑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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