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자리와 거리
  • 입력 : 2024. 09.20(금) 02: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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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손'.

[한라일보] 2024년 추석 극장가의 흥행 승자는 9년만에 돌아온 천만 영화의 속편 '베테랑 2'가 될 것이라는 기사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서너 편의 대작들이 극장가를 찾던 명절 대목은 이제 옛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족 고유의 명절이라는 설과 추석에 흥행작이 탄생하지 않는 흐름이 몇 년 째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극장가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작품이 '베테랑 2'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 개봉작이 '베테랑 2' 한 편일 뿐 지난해부터 영화제들을 통해 호평을 이어온 독립영화 기대작 3편이 나란히 올 추석 극장가를 수놓았다. 9월 4일 개봉한 '딸에 대하여'를 비롯 9월 11일 나란히 개봉하는 '장손', '그녀에게'는 섬세한 연출과 선명한 연기, 묵직한 메시지를 남기는 수작들로 극장가를 풍성하게 채워줄 작품들이다. 각기 다른 소재를 택한 개성이 넘치는 작품들이지만 세 작품 모두 지금 한국 사회의 가족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담아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가족 간의 대화로 또 한 번 완성될 작품들이기도 하다.



이미랑 감독, 오민애, 임세미, 하윤경 배우가 함께 그려낸 '딸에 대하여'는 김혜진 소설가의 동명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요양보호사로 돌봄 노동을 하고 있는 엄마에게는 시간 강사로 일하고 있는 딸이 있다. 그리고 딸을 그린이라고 부르는 그의 연인 레인이 그린 곁을 7년째 함께 하고 있다. 엄마와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 세 사람은 한 집에서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엄마는 비로소 딸에 대하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과 딸이 속한 세상에 대하여 눈을 뜨고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딸에 대하여'는 진지하고 사려 깊은 퀴어 영화인 동시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에 속한 중년 여성 노동자, 고령의 여성 환자들의 면면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김혜진 소설가의 원작이 던진 화두들을 영화적 풍경으로 옮겨낸 이미랑 감독의 연출력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세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오민애, 임세미, 하윤경의 트라이앵글이 힘 있게 관객들을 끌어 당긴다. 풍경화 속의 인물화를 그려내는 정밀하고 균형 잡힌 화법으로 지금 우리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 '딸에 대하여'다.



오정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장손'은 두부 공장을 가업으로 하는 어느 가문의 제삿날, 3대가 모두 모이는 지극히 한국적인 시간에서 시작한다. 멀리서 보면 서정적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이 가족의 시간에서 구성원들은 각각의 계절들로 소란스레 부대낀다. 그리고 가족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장손은 가문의 업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연이어 묵히고 삭혔던 것들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던 것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장손'은 앙상블의 영화다. 할머니 말녀 역할을 맡은 베테랑 배우 손숙을 시작으로 장손 성진을 연기하는 배우 강승호까지 열 명 가까이 되는 출연진들이 이 가족의 면면들을 살뜰하게 채운다. 전통적인 가족의 삶에서는 관습적인 주인공의 역할을 맡아왔던 이가 장손이겠지만 영화 '장손'은 실상 그럴 리 없는 가족의 계절들을 무대 삼아 가족 모두의 앞과 뒤를 입체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핏줄로 시작되어 밥줄로 이어지는 지난한 동행이자 외로운 각자를 마법 같은 점성으로 뭉쳐내는 평생의 미스터리이기도 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록이자 기억을 '장손'은 성실하고 묵직하게 잇고 더듬는 영화다.



이상철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김재화가 주연을 맡은 '그녀에게'는 장애인 아들을 둔 엄마 상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열혈 정치부 기자였던 그녀에게 쌍둥이 남매가 생기고 둘째 지우가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으면서 상연과 가족의 삶은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세상의 편견에서 비롯된 무수한 일상의 장애물들을 넘어서고자 노력하고 절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엄마 상연의 분투가 배우 김재화의 열연으로 스크린에 빼곡히 새겨진다. '모가디슈', '밀수'등의 대작을 통해 존재감을 보여준 바 있는 김재화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이끄는 상연의 모습처럼 '그녀에게'의 모든 순간을 온전히 견인하며 캐릭터와 배우가 만나 길어 올릴 수 있는 감흥과 감동을 선사한다.



추석 극장가에는 영화가 없다는 말들에 '없긴 왜 없어!'라고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있는 세 작품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 머무는 자리를 유심하게 관찰하고 각자의 인생에서 명쾌하게 가늠하기 힘든 가족 사이의 거리를 골몰히 바라보는 세 편의 영화 '딸에 대하여', '장손', '그녀에게'를 극장의 스크린을 통해 만나고 그 귀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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