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길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우리의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음만 조급해지기 마련이다. 엄습해 오는 두려움, 이대로 멈춰서 잊힐 것만 같은 불안함으로 한 발짝도 뗄 수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치 가위에 눌린 것 같은 기분일 때 누가 나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스스로를 바라보고 온전히 믿으면 멈춰선 나를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인다는 것, 제자리를 찾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스스로 벗어난다는 것, 길을 잃었다고 해도 나를 잊지 않는 것, 놀랍도록 신비로운, 내 마음과 몸이 맞닿는 순간. 영화 '피나'는 춤이라는 움직임, 그 변화의 기적으로 가득한 영화다.
독일의 전설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이름을 딴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피나'는 일반적인 전기 영화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영화다. 안타깝게도 본격적인 영화의 제작에 앞서 피나 바우쉬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피나'에는 피나 바우쉬의 다른 몸이라고 해도 무방할 그녀의 무용단 부퍼탈 탄츠테아터 앙상블 단원들의 대표 공연들이 영화적인 방식으로 담겨 있다.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물며 예술의 한 뼘을 넓힌 피나 바우쉬의 황홀하고 격정적인 무대가 스크린에 펼쳐지고 무대 밖으로 나와 부퍼탈의 곳곳을 무대로 쓰는 무용수들의 자유로운 몸짓이 더해진다. '봄의 제전', '카페 뮐러', '콘탁트호프', '보름달' 순으로 이어지는 피나의 대표적인 무대 공연들은 우리가 익히 봐왔던 무용 공연과는 다르다. 피나의 무대 위에는 장애물이라고 여겨질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바닥을 가득 메운 흙과 거대한 돌, 쏟아지는 비와 수많은 의자들이 함께 존재한다. 무용수들은 이 제약처럼 보이는 요소들 사이로 움직이고 부딪히며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이야기가 피어나고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까지 전해진다.
'파리, 텍사스'를 비롯 근사한 로드 무비를 만들어 온 빔 벤더스 감독은 영화라는 자신의 길 위에 다른 예술의 장르들을 여러 차례 초대해 환대의 자리를 선사한 바 있다. 쿠바 음악의 정수를 스크린에 담아내며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음악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 영화가 음악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인지를 느낄 수 있게 한 그의 작업이었다. '피나'는 영화가 무용이라는 예술의 손을 어떤 온기로 잡을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언어라는 제약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춤은 명징하게 해석되지 않는 체험의 소통이다. 상대가 표현한 것을 내가 느끼는 일, 내가 느낀 것을 상대에게 전하는 일에서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기에 춤은 늘 무성하고 풍성하게 존재한다. '피나'는 그래서 아름답다. 우리가 단 하나의 길 위에서 인생을 살 리가 없기에 춤을 추다 맞닥뜨린 모든 새 길들이 다른 방식의 답이 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피나'의 춤에는 고통과 환희가 함께 존재한다. 고통과 환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아님을 영화는, 춤은, 피나는 보여준다. 예술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 끝내 외면하지 않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각각의 환희로 향하는 그 길 위에 놓일 것이다. '춤추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피나'가 손을 건넨다. 잡는 순간 요동치는 마음이 다음의 방향을 가르쳐 줄 지도 모른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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