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떠나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에 가까울까. 도피와 탈출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해도 회피와 외면의 심정으로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것이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환상의 공간 옆에는 수심이 가득한 집 혹은 무엇도 남지 않아 공허한 집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는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다. 지켜낼 수 밖에 없는 텅 빈 공간 위로 복잡한 마음이 무게를 더하고 시간은 흐른다. 집 안에 살고 있지만 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서는 이가 있다.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콜럼버스>의 케이시(헤일리 루 리차드슨)가 그렇게 거기에 살고 있는 이다.
머무른다는 것은 책임의 영역일까 혹은 미련의 시간일까. 세계적인 건축학자인 이재용 교수가 강연을 앞두고 돌연 쓰러진다. 한국에서 번역가로 살고 있던 아들 진(존 조)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오랜만에 콜럼버스로 향한다. 사랑보다는 원망이 더 많이 묻어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진은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번갈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아버지의 병세도 둘의 관계도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도시 콜럼버스에 머무르는 것 뿐이다.
<콜럼버스>에서 케이시와 진은 반경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다. 떠나지 못하는 케이시와 떠날 수 없는 진은 비슷한 속도로 삶을 걷는 이들이고 둘은 마주침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낯선 타인들이 서로의 영혼에 묻어 있는 결핍과 상처를 들여다 보는 일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조용한 도시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간을 공유하며 둘 사이엔 기적이라 부를만한 조우가 발생한다. 말 없이 그들 앞에 서 있는, 집이 아닌 공간을 함께 나누면서다. 이 땅 위에 흔들림 없는 형태로 자리잡은 건축물들을 함께 바라보던 시간들 사이에서 생겨난 일이다. 소설가 이승우는 저서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 '공간은 인물에게 처소를 제공하고 시간은 인물에게 움직임을 제공한다. 시간이 인물을 움직이게 한다.'라고 썼다. 케이시와 진에게는 각자의 집이 아닌 콜럼버스라는 도시가 처소가 되는 셈이다. 복잡한 감정을 안고 집 밖에 나선 이들이 고요하게 흐르는 시간을 겪으며 마음의 움직임을 통해 각자의 삶을 움직이는 일이 영화 <콜럼버스>의 유일하고 중요한 단 하나의 사건이다.
알코올 중독인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케이시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자신의 위태로운 가정 환경과는 다르게 침묵과 균형으로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건축물들이다. 그녀는 인간이 만든 가장 견고한 형태들 앞에서 위로 받는 이고 그로 인해 삶을 지탱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세계적인 건축학자인 아버지를 두었지만 진에게 건축물들은 아버지와의 거리 만큼이나 가깝지 않는 것들이다.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사랑했던 것들이 진에게는 그만큼의 무게로 다가오지 않는다. 진이 바라보는 건축물들 앞에는 아버지라는 벽이 존재한다. 그런 진에게 그 벽 너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케이시라는 존재다.
<콜럼버스>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간다. 안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공간 안에 자리잡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케이시와 진의 변화에도 밀도 높은 시간이 필요함을 영화는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더디고 지루한 여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 발자국'의 의미를 담아내는데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콜럼버스>는 삶의 속도를 과장하지 않고 담아낸 정직하고 성실한 성장 영화다. 떠돌다와 머무르다 사이에서 발견하고 나아가다로 이르는 선택이 결코 쉽지 않음을 어딘가에 갇힌 경험이 있던 이들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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