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52] 3부 오름-(11)'앉다', '앉치다'가 아니라 '작다'는 뜻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52] 3부 오름-(11)'앉다', '앉치다'가 아니라 '작다'는 뜻
이름만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 안친오름
  • 입력 : 2023. 08.29(화) 00:00  수정 : 2023. 11. 09(목) 16:05
  • 송문혁 기자 hasm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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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친오름, 10여 개에 달하는 이름들이 품은 뜻

[한라일보] 돋오름에서 서남 방향 송당마을 사이에 안친오름이 있다. 아진오름이라고도 한다. 행정구역 상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지경이다. 오름의 둘레는 924m, 저경 319m, 면적은 46,443㎡, 높이는 192m이다. 이 정도 설명만으론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오름이 아닐까? 하지만 오름 자체의 높이가 22m에 불과하다. 규모도 작고 높이도 낮다. 산의 높이가 아파트 3층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거기 오름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지경이다.

전체적으로 나지막하며 북쪽 비탈면에 북쪽으로 입구가 벌어진 말굽형 분화구가 있고, 분화구 안쪽의 넓은 풀밭 한가운데에는 여러 기의 묘가 자리 잡고 있다. 남쪽 비탈면은 풀밭으로 덮여 있다. 오름 기슭 일대에 인공적으로 심은 삼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일대는 대부분 농경지로 조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당근을 주로 심는다.

돗오름의 오른편 파란 건물 뒤 잔디밭처럼 보이는 부분이 안친오름.

오름의 이름은 1899년 '제주군읍지'에 좌악(坐岳)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지도에는 좌치악(坐置岳), 1954년 '증보탐라지'에는 좌치악(坐雉岳)으로 나타난다. 그 외로도 인근 비문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좌치악(座置岳), 안치악(安置岳), 아치악(我置岳), 아친악(雅親岳), 아천악(阿穿岳), 아시악(峨崼岳) 등도 나타난다.

이와 같은 기록을 정리해 보면 아시악(峨崼岳), 아진오름, 아천악(阿穿岳), 아치악(我置岳), 아친악(雅親岳), 안치악(安置岳), 좌악(座岳), 좌치악(坐置岳), 좌치악(坐雉岳), 좌치악(座置岳) 등이다. 이렇게 파악 가능한 이름만 해도 10개에 이른다. 오름의 규모가 작아서 그 존재감이 흐릿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름을 가진 것만으로 그 존재는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오름 이름을 해독한다면서 제시한 내용을 보면, 오름의 형상이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사람의 모양과 닮은 데서 유래했다거나, 안친오름의 '안친'은 '앉히다'에 대응하는 제주어 '안치다'의 관형사형으로, 오름의 형세가 '나지막하게 앉힌 솥과 같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들 한다.



글자 뜻 그대로는 안 풀려,
'안친'은 '앛'의 다른 표기

이런 풀이들은 안친오름의 '안친'의 소리가 '앉은' 혹은 '앉힌'과 유사하다는 점에 이끌린 측면이 강하다. 제주어에서는 특히 '앉은'의 뜻으로 '아진'이라 한다. 또한 좌악(坐岳), 좌치악(座置岳)의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한 것이다. 좌악(坐岳)의 坐(좌)는 '앉을 좌'라는 글자다. 좌치악(座置岳)의 座(좌)는 '자리 좌'라는 글자다. 이런 글자들을 한자는 뜻글자라는 취지에 철저하게 맹종하여 풀이한다면 당연히 '앉다(sit down)'라거나 '자리(seat)'로 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이름들은 현대 제주어에 남아 있는 음상과 결부하여 생각해 보면 '앉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솥을 자리 잡아 설치하다의 뜻으로) 앉치다' 혹은 '자리'로 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풀어버리면 나머지 표기들은 어쩔 것인가. 아시악(峨崼岳), 아진오름, 아천악(阿穿岳), 아치악(我置岳), 아친악(雅親岳), 안치악(安置岳), 좌악(坐岳), 좌치악(坐置岳), 좌치악(坐雉岳), 좌치악(座置岳) 중 좌악과 좌치악(坐置岳)은 이처럼 풀었다 치자. 그 나머지 8개의 명칭은 어떻게 대접해 드려야 하나?

당근밭 뒤로 보이는 안친오름.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김진

아시악(峨崼岳)은 '앉다' 혹은 '자리'와 무관한 글자로 되어있다. 아천악(阿穿岳), 아치악(我置岳), 아친악(雅親岳), 좌치악(坐雉岳), 안치악(安置岳) 등도 도무지 '앉다' 혹은 '자리'와는 연결되지 않는 글자들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글자들은 모두 훈가자거나 음독자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아시악은 '앗', 아천악은 '앛', 아치악도 '앛', 아친악도 '앛', 안치악도 '앛'이다. 이런 관점에 다시 들여다보면 그토록 '앉다'거나 '앉치다'로 철석같이 믿었던 좌악(坐岳)도 사실은 '앉을 좌'의 훈독자 '앉'과 악(岳)의 결합이니 '앛오름'의 한자 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좌(坐)라는 글자도 '앉다'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앛'을 쓰려고 한 것이다. 좌(座)라는 글자도 '앛오름'이지 '앉은오름'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려고 쓴 글자다.



돗오름과 안친오름은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의 관계

따라서 이미 '아끈다랑쉬오름'을 설명하면서 '앛'계열의 어휘들이 여러 갈래로 파생했는데 이들은 모두 '작은'의 뜻을 갖는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앛-', '앚-', '앗-' 등 '앛'계열의 말은 '아추'를 기본형으로 하는 말로서 '어리거나 작은'을 뜻한다. 퉁구스어권에선 '아치', 몽골어권에선 '아진'으로 전개된다. '아끈ᄃᆞ랑쉬오름'의 명칭변화와 마찬가지로 안친오름 혹은 아진오름이라는 명칭에서도 당시는 퉁구스어권과 몽골어권에서 기원한 언어가 혼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ᄃᆞ랑쉬오름 옆의 아끈ᄃᆞ랑쉬와 돗오름 옆의 안친오름(아진오름)의 관계는 오름을 보는 제주도 고대인의 시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오름을 어떤 표지, 즉 지경을 설명하는 데 기준으로 사용하려면 인접한 오름 혹은 계곡과 같은 특정한 지형과의 관계를 이름에 담는 것이다. 큰오름 옆의 작은 오름, 높은 오름과 낮은 오름 같은 대립되는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랑쉬오름이 이 일대에서 워낙 압도적이긴 해도 고대인들은 돗오름도 그에 못지않게 높은 오름으로 여겼다. 그래서 (높게) 도드라진 오름이라는 의미로 돗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 그 옆의 작은 오름에는 작은 오름이라는 뜻으로 안친오름 혹은 아진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랑쉬오름 바로 옆의 작은 오름을 아끈다랑쉬라고 이름한 것과 같은 이치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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