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3. 09.27(수) 00:00 수정 : 2023. 09. 29(금) 12:47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다음달이면 100세를 맞는 실향민 최용도 할머니(사진 왼쪽)와 딸 김영애씨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강희만기자
1946년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남편 따라 이남으로 큰아들 병으로 잃은뒤 낳은 6남매 키우며 타향살이 1983년부터 이산가족 찾기 신청했지만 매번 고배 2007년 금강산 관광… "고향 땅 밟은것 같아 감격"
[한라일보] "라디오 방송부터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하는 등 안해본게 없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이북에 있는 하나뿐인 조카를 찾으려고 애를 쓰셨어요. 근데 결국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죠."
김영애(73)씨의 어머니 최용도(99) 할머니의 고향은 평안북도 용천군 양서리이다. 최 할머니는 이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언니 최봉도씨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 최 할머니는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 김치호(향년 82)씨를 만나 1943년 아들 김건일씨를 낳았다. 아들이 태어난지 3년째 되던 1946년 이북에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되면서 공산분위기가 확산됐다. 공산주의의 불합리를 피해 이남으로 가자는 남편을 따라 최 할머니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고향을 떠났다.
이남으로 건너오는 과정도 험난했다. 먼저 신의주에서 해주까지는 기차를 통해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당시 이북에서 이주가 엄격하게 제한되면서 가족인 것을 숨겨야 했기 때문에 해주에서 개성까지는 남편이 먼저 어부들의 배를 타고 이동하고, 최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그 다음 배로 이동했다. 최 할머니는 어린 아들이 울까 노심초사하며 배 아래 나무바닥에 아이를 꽁꽁 숨겨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개성에서 3일을 머무른 후 최 할머니 가족은 최종적으로 서울로 향했다.
이때 최 할머니는 유행성뇌척수막염 감염으로 아들을 잃었다. 아들의 치료를 위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사용하면서 최 할머니의 힘겨운 이남 생활이 시작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해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을 가면서 최 할머니는 그리운 고향과 더욱 멀어졌다.
최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와 남대문에서 옷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6남매를 키웠다. 자식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서 최 할머니와 남편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이 더욱 생각났다.
그러다 1974년 이산가족을 찾는 라디오가 방송되자 최 할머니는 주위의 이산가족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가족을 찾았다. 1975년에는 이북 5도민 모임을 통해 조카의 행방을 물었고, 1983년에는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했다. 그러나 최 할머니는 번번히 상봉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조카의 생사라도 확인하려했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4년 발생한 북한의 용천 기차사고는 최 할머니의 실낱 같은 희망마저 앗아갔다. 최 할머니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역에서 일어난 열차 폭발 사고는 당시 1200여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어머니는 당시 사고가 방송되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어요. 만약 사촌오빠가 살아계셨었다고 해도 그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 않았을까. 그래서 소식이 안들리지 않았을까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죠. 그 이후로는 (조카를) 찾겠다고 안하셨어요."
고향을 떠나온지 어느덧 77년. 내달 25일이면 최 할머니는 상수(100세)를 맞는다.
"어머니가 고향을 떠난지 61년 되는 2007년 어머니와 함께 금강산 관광을 갔어요.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이제야 고향 땅을 밟았다고 하시면서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가족을 만났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그게 아쉬워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국내에 최 할머니처럼 북에 가족을 두고온 이산가족은 13만3685명이다. 제주에는 414명의 이산가족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김채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