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59] 3부 오름-(18)‘숱’, ‘삿’, ‘싕’, ‘생’이 붙는 오름은 ‘높고 긴 산’ 의미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59] 3부 오름-(18)‘숱’, ‘삿’, ‘싕’, ‘생’이 붙는 오름은 ‘높고 긴 산’ 의미
  • 입력 : 2023. 11.14(화) 00:00  수정 : 2023. 11. 14(화) 10:17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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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 ‘삿’, ‘솟’, ‘싕’, ‘생’은 모두 같은 어원에서 출발


[한라일보] 봉우리를 수리라고 하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봉(峯)을 수리라 하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봉성현(峯城縣)을 술이홀현(述爾忽縣)이라 하고, 상홀(上忽)을 거홀(車忽)이라고도 한다"라는 구절에서 봉(峯)과 술이(述爾), 상(上)과 거(車)가 대응한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현대국어로 읽어보면 봉(峯)은 '술이'이고 상(上)은 '수레'다. 이 지명은 산봉우리 혹은 고갯마루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다. '수리'는 현대어 '정(頂)수리'에서도 보듯이 꼭대기를 뜻하는 어사로서 지명에서 산 이름으로 쓰일 때는 높은 산이나 그 산의 정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비오름에서 바라본 큰사슴이오름(대록산), 동서로 긴 산맥의 형태를 보인다. 사진 김찬수

그런데 여기서 무심코 넘어가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한자음이 오늘날 우리 국어에서 읽는 소리와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고려 시대 술천군(述川郡)은 고구려 때에는 성지매(省知買)라고 했었다는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성지(省知)는 '수투'로 발음했다. 봉우리를 뜻하는 '生(생)'은 제주어 '어승생'에서 확인된다. 이 말이 고려에 와서는 술(述)로 기록하고 숱(sut)으로 발음했다는 점도 밝혔다. 놀랍게도 제주도의 지명에는 '생'과 '숱' 이 두 가지가 다 나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이 '생'과 '숱'은 사실 같은 어원에서 갈라져 '숱', '삿', '생', '싕' 등으로도 가지를 쳤다. 고구려와 고려라는 시대에 맞춰 변했다기보다 지역에 따라 혹은 언어사회에 따라 달랐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사스미오름, 거린사슴도 어승생오름과 같은 계열


봉우리 혹은 산을 지시하는 '생'과 '숱'은 점차 '수리'로 발음하게 되었다. 이 말은 다시 '쉬'로도 음운 변화를 거쳤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지난 회를 참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과 '숱'의 공통어원은 어떤 것인가. '생'이란 말은 어승생오름에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숱'은 어느 오름 이름에 남아 있다는 것인가.

제주도의 지명에 다양하게 변신하면서 박혀 있는 것을 여기저기서 확인할 수 있다. 사슴이오름이 있다. 지형도로 볼 때는 3~4개의 오름이 붙어 있으나 현장에서는 큰사슴이를 중심으로 동서로 길게 산맥처럼 보인다. 그중 높은 봉우리는 큰사슴이오름 혹은 대록산(大鹿山), 낮은 봉우리는 족은사슴이오름 혹은 소록산(小鹿山)으로 부른다.

이 '사슴이'라는 말은 실제 발음은 '사스미' 혹은 '사사미'로 들린다. 한글로 표기하면서 언어 습관상 '사슴이'라 적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슴이'라고 적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슴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1653년 '탐라지'에는 장악(獐岳)이라고 했다. '사슴'을 지칭할 때 노루 '장(獐)'을 쓰기도 했다. 1703년 '탐라순력도'에는 녹산(鹿山), 혹은 대록산(大鹿山) 소록산(小鹿山)으로 표기했다. '사슴산'이라는 뜻이다. 이후 '제주삼읍도총지도', '대동지지', '제주삼읍전도', '제주군읍지' 등 17~18세기의 여러 책에 녹산(鹿山)이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이 이름은 19세기 '증보 탐라지'를 비롯한 여러 기록에 이어졌다. 이것은 '사슴이'라고 발음한다는 취지의 훈가자로 쓴 것인지, 사슴이 많이 산다거나 사슴과 같이 생겼다는 뜻으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하는 훈독자로 쓴 것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다. 1996년도에 간행한 '남제주군 고유지명'이라는 책에는 '이 오름의 지형 지세가 마치 사슴과 비슷하다 하여 큰 오름은 큰 사슴이, 작은 오름은 족은 사슴이라 불리워진다.'라고 나온다. 실제 이 오름을 보고 사슴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이름에 이끌린 설명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녹산(鹿山)이라는 한자 표기는 그냥 발음을 '사스미'라 한다는 취지로 쓴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거린사슴을 포함해 몇몇 그 외 '사슴' 오름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어승생오름, 사스미오름, 거린사슴은 모두 길게 늘어진 산


그렇다면 이 헷갈리는 '사스' 혹은 '사사'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고려 때는 봉우리를 술(述)이라 쓰되 '숱(sut)'이라 발음했으며, 이보다 훨씬 전인 고구려 때에는 성지(省知)라 쓰고, '수티(suti)'라고 했었으며, 이게 오늘날에는 '수리'라 한다.

이 '수티'는 점차 폐음절화 하여 '숱'이 되었다. '숱'은 사실상 '숫'과 같은 발음이다. 이 말은 발음상 ‘삿', ‘삿'과도 같다. 현재 제주도의 지명에서 보이는 '사스미' 혹은 '사사미'는 결국 '삿미' 혹은 '삿미'의 변음이다. 여기서 '미'란 산을 의미하는 지명어다. '삿'은 '(높은) 봉우리'를 지시한다. 오늘날 '솟다'의 명사다, '솟구치다', '솟아오르다'의 '솟'도 같은 기원이다. 봉우리를 지시하는 '삿'이라는 고구려어는 여러 언어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투르크어권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다. ① 등뼈, ② 정상이 평평한 산(tableland) 혹은 산맥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제르바이잔어, 투르크메니스탄어, 중세 투르크어, 카자흐어에서는 ②의 정상이 평평한 산 혹은 산맥, 우즈베키스탄어, 타타르어, 바슈크어, 카라칼팍어, 쿠미크어, 투바어, 토팔라어, 추바쉬어에서는 두 뜻 모두, 위구르어, 카라차이발카어, 노가이어, 카카스어, 오이라트어에서는 ①의 뜻을 갖는다. 어승생오름, 사스미오름(대록산), 거린사슴의 형태로 볼 때 제주어에서는 산맥을 형성하는 봉우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제주의 선주민이 누구였는지에 관한 단서를 시사하고 있다. '사슴산'이 내포하고 있는 '숱', '삿', '생', '싕' 등은 산맥처럼 길게 늘어진 산을 지시하고 있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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