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면 축복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경이로움을 바라볼 수 있다면 또 삶이 얼마나 융융할 것인가. 인디언 이로쿼이족의 사상과 자연관은 꼭 이쯤에서 제주도를 생각하며 함께 교차(交叉)된다. 물과 공기 그리고 바람과 햇빛 등 세상 만물과 모든 생명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사상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연과 대화하며 감사 기도를 한다. 기도는 자연과 닮아가려는 소박하고 겸허한 마음의 표출이다.
가을, 11월이 되기만 하면 오름이며 들길이며 바닷길을 찾아 가을의 정기를 마음껏 흡입하겠노라 다짐하곤 했다. 하지만 이게 또 마음만이라서 늘 핑계를 내세우는 일은 참 따분한 일이다. 며칠 전 우연히 만난 이로부터 들었던 충고는 내게 죽비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제주로 돌아오셔서 옛것들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걸 충분히 헤아리기는 하겠지만, 더 고와지고 맑아지는 것들도 그려주세요. 선생님 글과 칼럼을 읽으면서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더라고요. 왜냐하면 그런 시선과 마음으로 다치고 상할 것은 선생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이 들어서요."
세상 누구보다 축복을 노래하고 감사의 기도로 새벽을 열고 낮아져서 살아가는 일이 늘 경이로움에 환장해도 부족한데, 뭘 아는 것처럼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도 시원치 않은데 무슨 불만으로 외마디처럼 악다구니로 살았던 것인지. 비틀거렸던 삶으로 몸의 병을 얻어 겨우 목숨을 부지한 처지로 생수 한 모금을 벌컥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이런 축복의 대가로 비록 고난이 주어진다고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며 천천히 걸어가는 삶이라야 옳다. 몸의 다른 곳을 또 고쳐야 한다면 나이들어 가는 자연스러움이라 여기며.
특별한 이유나 동기가 없어도 가끔 홀로 찾아가는 곳이 저지곶자왈 숲길이다. 방림원 남쪽 목장길을 따라 마중오름과 강정동산을 지나는 곶자왈 숲이다. 문도지오름 입구에 이르면 잠시 쉬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사람이란 얼마나 자연을 닮고 싶은 것일까. 소똥 말똥 냄새로 피식거리다가 길을 호위하는 삼나무 숲에 이르면 맹자의 호연지기를 얻은 것처럼 가슴이 뛴다. 어느 계절이든 느릅나무는 나를 유혹한다. 잎이 떨어진 가지마다 옹이를 드러내며 밑동으로는 수피(樹皮)를 돋우고 겨울을 난다. 문득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이곳에 머무는 것 같다.
현실이나 상황의 부조리함을 느끼게 되는 일은 나로서는 오만이다. 내가 모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시시비비를 따져보려는 마음 또한 얼마나 공허한가. 왜냐하면 대전제부터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지만, 이 가을에 저지곶자왈 숲길을 걷고 있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보게 되기도 하고 모든 일이 다 그럴만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하는데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내게로 오는 것만 같다.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