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51)성산읍 삼달1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51)성산읍 삼달1리
선비마을 전통이 내면에 살아 숨 쉬는 마을
  • 입력 : 2023. 11.17(금) 00:00  수정 : 2023. 11. 19(일) 14:12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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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나지막한 본지오름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참으로 평화롭다. 멀리 바다와 삼색깃발처럼 드러나는 자연의 상징메시지가 있다. 활처럼 굽은 능선을 따라서 촘촘하게 들어선 봉분들. 삼달리공동묘지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답고 아늑한 묘지가 어디 있을까? 북서풍을 막아주는 지형과 앞에 탁 트인 시야가 평화로움을 자아낸다. 마을공동체란 이렇게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는 시간성을 보유한 존재이리라.

삼달1리는 바닷가와 인접한 삼달2리에서 북쪽으로 2㎞ 정도에 정주공간이 형성돼 있다. 북동쪽으로는 독자봉을 경계로 신산리와 접하고, 통오름을 경계로 난산리와 접하며, 남산봉을 경계로 성읍리와 접한다. 본지오름을 경계로 신풍리와 인접하고 있으니 사방이 오름으로 둘러친 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 지명은 '와겡이'. 조선 초기부터 한자 표기로 와강(臥江)이라고 불렀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처음 마을이 형성되던 시기에 '더러물내'의 형상을 따라서 지어진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그렇게 부르다가 마을 이름이 삼달리로 바뀌게 된 것은 정조 때 사헌부 장령 등의 벼슬을 지냈던 강성익 공이 양반이 사는 마을 이름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삼달리라고 바꿨다는 것이다.

자연자원이 풍부하여 조상 대대로 이웃들과 공유하며 살아온 자산이라 하겠다. 미와연못, 너부못, 용오리못, 수어못, 막굴, 문괴굴, 오미동산 등 경관적 가치를 증폭시킬 요소들이 즐비하다. 올레3코스에서 만나는 정겨움이라고나 할까. 마을공동체의 대표적인 자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49.6㏊에 달하는 삼달리공동목장이다. 여기에 들어선 풍력단지도 있지만 봄이면 양질의 고사리들이 솟아나 이를 캐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강성은 이장에게 삼달1리의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명쾌하게 대답하였다. "마을 이름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풀어서 해석하면 이렇다. 세 가지 도달하고자 하는 삶의 가치이자 마을 공동체의 목표는 忠, 孝, 德이다. 마을 이름을 삼달리라고 바꾸던 시기에 양반마을의 위세와 자존심을 담아낸 것. 전해 내려오는 당시의 뜻이 감동적이다. '규율이 없으면 조정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웃어른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마을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보은과 백성을 위함이 오직 덕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대대로 선비마을의 명성을 이어온 것은 태어나 자라면서부터 마을공동체의 명칭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세를 교육받았기 때문. 노인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회고담 속에 녹아있는 '유년 시절 마을 이름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바른 행동이 몸과 마음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해석. 이러한 정신문화유산은 남다른 교육열로 승화되어 삼달리 출신 인사들이 각계각층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도 이러한 마을 이름에서 오는 자긍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 마을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는 굳은 의지가 결과적으로 성공한 사회적 삶으로 귀결되는 일종의 놀라운 집단적 지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방법을 마을 명칭으로 삼은 마을공동체의 의지가 아름답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삼달리에 귀농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이. 이웃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우가 바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상식에서 그렇다. 처음에 마을 분위기가 너무 아늑하고 매력적으로 느꼈지만 마을사람들이 선량함과 정이 넘치는 분위기에 감동하였다는 것이 귀농가족들의 중론이다.

마을공동체의 자존심이 후손들의 성공적인 삶을 견인해 내는 감동적인 저력. 이러한 굳건한 의지가 있어 마을의 미래 또한 밝으리니. 효에 대한 실천 의지가 다른 마을에 비하여 과도할 정도로 강하다. 마을 어르신들의 현명한 판단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밖에 나가서 성공하여 살고 있는 주민들이 고향을 찾아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땅을 팔지 말아야 한다. 돌아와 살 곳이 없는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니까." 선비마을 맞다. <시각예술가>



수어못 가는 길
<먹 담채 79cm×35cm>



마을회관 길 건너 맞은편이다. 유서 깊은 마을의 중심에서 일터로 나가던 길. 수백 년 전과 같이 강렬한 햇살이 길을 비추니 길의 좌우만 달라졌을 뿐, 바닥만 달라졌을 뿐 길은 그대로다. 오른쪽은 작은 밭이며 길가에 나무들이 큰 덩치로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큰길가 전봇대의 그림자도 바닥으로 기어가 돌담을 타고 넘는다. 채도를 버리고 오직 연필로 그린 이유는 저기 소실점 위치에서 방풍림 그림자에 어두워진 길을 그리고자 하였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이어지는 길로 느껴졌기에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 마을 조상들이 저 길로 등짐을 지거나, 마소와 함께 다녔을까? 이 자존심 강한 선비마을이 추구하던 이상 또한 저 길을 걸어 다녔으리라는 추측과 함께. 회화적으로 좌우 대비다. 오른쪽은 나무가 보유한 어두운 느낌과 왼쪽에서 반사되는 초겨울 태양광선. 놀라운 경우의 수가 화면의 중심에서 일어난다. 방풍림에 의하여 생성된 어두운 공간감이 좌우를 향하여 시각적 화해와 조화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행하지 않을 수 없는 구도다. 색이 있고 나면 색에 의하여 이러한 명암의 본질이 흐려지고 마는 경우를 흔히 발견한다. 명확해야 할 현장의 광선에 대하여 파악하려면 안타깝지만 채색은 다른 화면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왼쪽 돌담에 담쟁이 색을 칠하지 못한 것이다. 원근법이 지닌 야릇한 매력을 길이라고 하는 테마 속에서 변화를 모색하였다. 왼쪽이 인간 오른쪽이 자연이다, 길에서 만나는.



돌담 위에 놓인 한라산
<수채화 79cm×35cm>



이렇게 작위적인 상황을 보통 그림 같다고 한다. 그림 같아서 그렸다. 성읍리에서 남동쪽 바다 방향으로 내리막길을 가다 보면 해발 고도가 낮아짐으로 하여 발생되는 놀라운 시선이 있다. 한라산의 능선이 필경 날개를 펼치려는 새와 흡사하다. 웅비를 꿈꾸던 선비마을의 숨은 인재들이 연상된다면 과도한 상상이려니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저 산이 주는 느낌에는 변함이 없으니 앞으로도 큰 뜻을 품은 자들이 이 마을에서 나와 세상에 나가 날개를 펼칠 것이다. 고전적인 상념으로 와트만지에 수묵담채의 느낌으로 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의 담백한 품성을 그림 속에 넣으려니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 돌담들의 변화가 교향악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흐름이 형성되어져 있다. 앞에 검게 퇴색된 불규칙한 돌담은 필경 수백 년 전에 쌓은 것이며 그 뒤에 중장비를 동원해야 운반이 가능한 돌들과 평범한 크기의 돌들이 섞여서 쌓은 반듯한 돌담은 오래지 않은 시기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심에 큰 봉분으로 보이는 타원의 일부가 저 멀리 한라산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구도로 파악하여도 매력적인 우연이라 그리게 된 것이다. 무게감 있는 돌들이 저음을 연주하고 그 위에 나무들이며 풀들이 중간 음, 저 멀리서 한라산이 고음을 연주하여 마치 으뜸삼화음을 이뤄낸 경우가 여기 삼달1리 풍광 속에 엄연하게 존재한다. 시점이라는 위치는 또 하나의 회화적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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