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모든 인간은 생명의 이치에 따라 태어나고 자라서 살아가다가 삶은 접고 어디론가 되돌아간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정신문화를 생성하고 진화시키는 일에 공헌한 예술가를 꼽으라면 몇 명을 거명할 수 있을까? 관점에 따라 그 수가 달라질 수 있겠으나, 그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 김민기를 꼽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민기는 한국 현대사에 박힌 고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자신의 몸으로 받아안고 살아온 참 예술인이다. 몇 해 전 아침이슬 50주년을 맞아 트리뷰트 콘서트와 앨범, 전시 등의 행사가 열렸을 때도 그는 한사코 앞에 나서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 후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지금까지도 놓지 않고 있는 일은 어린이극이다. 어른들을 위한 연극과 미취학 아동들을 위한 연극은 있지만, 어린이를 위한 연극은 없다는 이 현실에 맞서 학전 소극장에서 어린이 연극을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공공이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이 꾸려온 것은 순전히 참 예술인 김민기 정신의 뜻과 힘 때문이다. 그 잘나가던 '지하철 1호선'만이라도 계속 돌렸으면 빚은 지지 않았을 텐데, 저작권료며 기타 수입들을 꼴아박으면서 끝내 지키고자 했던 학전. 이제 그 긴 역사에 종언을 고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김민기의 암 투병 소식과 함께 2024년 3월 학전 폐관 소식이 들려왔다.
박학기를 비롯한 가수들과 설경구, 황정민 등의 배우들이 나서서 '어게인 학전'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에 영화와 연극, 문학, 미술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인들이 모여서 학전 폐관과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거의 모든 예술 장르가 함께 모여 김민기 정신을 되돌아보고 어려움에 처한 학전 살리기 운동에 나선 것이다. 덕분에 현재 진행 중인 어린이 연극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세상의 의로움은 김민기의 외로움을 끝내 외면하지는 않고 있다. 2024년 3월은 이렇게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로 세기의 국민예술가 김민기의 삶과 예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이다.
저 거친 광야의 1970년대를 관통하면서 그는 차디찬 얼음장 같은 침묵의 시대를 뚫고 '아침이슬'과 '공장의 불빛'을 쏘아 올렸다. 그 위대한 예술적 성취와 명망성이 그에게 남긴 것은 철저하게 유폐당한 삶이었다. 독재의 시대가 지나고 그의 예술이 제도권에서도 최고의 상찬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한국 예술의 가장 낮은 곳 대학로 소극장에서 희생과 헌신의 길로 일관했다. 시장 예술이 주류를 이루면서 예술가치는 시장가치의 하위개념으로 변화해갔다. 돈 되는 예술이 아닌 것은 존재할 길조차 막막한 시대를 지나면서도 그는 일관성을 잃지 않았다. 이제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그에게 답할 차례다. 그의 몸이 지치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그가 남긴 김민기 정신의 위대한 힘에 깃들어 새로운 예술과 사회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김준기 광주시립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