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64] 3부 오름-(23)걸세오름은 한둘이 아니다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64] 3부 오름-(23)걸세오름은 한둘이 아니다
연동의 걸시오름과 하례리 걸세오름은 ‘동명이악’(同名異岳)
  • 입력 : 2024. 01.16(화)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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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 걸세오름이 있다. 똑같은 이름으로 제주시 연동에도 걸세오름이 있다. 가까이에 어승생악 같은 큰 오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수도용 한밝저수지도 있다.

이름이 같은 남원읍 하례리와 제주시 연동의 걸세오름


제주시 연동 걸시오름에서 바라본 제주시.

높은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골짜기들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아흔아홉골에 연접해 있기도 하다. 이런 풍광 때문인지 천왕사 등 고찰이 있고, 공원묘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 오름은 제주시 연동 2448~281번지 일대다. 표고 732.4m, 저경 711m, 자체높이 82m, 둘레 약 2㎞ 정도다. 웅장한 규모라고 할 수는 없으나 꽤 높은 곳이긴 하다. 남쪽으로는 전체적으로 완만하여 거의 정상까지 도로가 나 있다. 이 길 끝부분이 분화구에 닿는 부분으로 화구는 북쪽을 향해 열려 있다. 이곳을 통하여 제주시의 구시가지와 제주항 그리고 사라봉과 별도봉 등을 막힘없이 조망할 수 있다. 여기서 동북쪽~동쪽으로 거슬러 오르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온다. 발아래 펼쳐지는 계곡은 수직으로 50m는 족히 될 것이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로 시야가 충분하지는 않다. 이 절벽은 남북으로 200~300m 정도다. 이 계곡은 용연으로 흐르는 한천의 한 지류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한천 본류까지는 마치 실개천처럼 좁아서 지도상으로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이곳만은 넓고 깊은 계곡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이 계곡과 오름의 사면이 만들어내는 지형은 하례리 걸세오름과 판박이다.



연동의 걸시오름(걸세오름)도 '급경사가 있는 오름'


오름의 이름도 하례리 오름과 거의 똑같이 걸시오름, 걸세오름, 걸쉐오름으로 부른다. 하례리의 오름이 걸세오름으로 널리 알려져서인지 최근에는 걸시오름으로 많이 표기한다.

하례리 걸세오름 절벽 아래 금유사터. 이 건물은 석공들의 숙소가 아니라 옛 절 건물이다.

하례리의 오름은 걸서악(傑西嶽·傑瑞嶽·傑西嶽), 걸시악(傑時嶽·傑豕嶽) 등으로 표기한다. 이 이름들은 걸쇠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거나 두 개울 사이에 끼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만,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은 '걸+세'의 구조를 갖는 이름이다. 여기서 '세'는 '쉐, 시'로도 나타나는 제주도의 지명에서만 보이는 '수리'의 또 다른 형태임을 밝혔다.

이 연동의 오름은 어떤가? 1872년 ‘제주삼읍전도’, 같은 해 나온 ‘제주군지도’, 1899년 ‘제주지도’에는 걸시악(傑始岳)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1899년 ‘제주군읍지’에는 걸시악(傑時岳)으로 나오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 자료인 1910년경 ‘조선지지자료’에는 걸씨악(傑氏岳)으로 표기했다. 이처럼 고전에는 걸시악(傑始岳), 걸시악(傑時岳), 걸씨악(傑氏岳)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 이 오름의 이름 유래에 대해 걸쇠를 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례리의 걸세오름 이름 유래를 설명하는 것과 똑같다. 다만 이 오름도 양쪽에 흐르는 개울이 있지만 두 개울 사이에 끼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이 오름의 모양이 걸쇠를 닮았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만약 이걸 걸쇠를 닮았다고 한다면, 걸쇠를 닮지 않은 오름이 몇 개나 될지 궁금해지게 되는 것이다. 걸쇠를 닮았다는 것은 오늘날의 언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끌어들인 결과일 뿐이다. 하례리의 걸세오름처럼 '급경사가 있는 오름'의 뜻이다. 이와 같거나 유사한 이름의 오름은 이외에도 여럿 있다.



하례리 걸세오름 건물은 석공의 숙소건물이 아니라 폐사된 건물


내친김에 '걸쇠'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걸쇠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대문이나 방의 여닫이문을 잠그기 위하여 빗장으로 쓰는 'ㄱ' 자 모양의 쇠'이다. 그런데 걸쇠란 말은 '걸+쇠'로 되어있다.

여기서 '걸'이란 '걸다'라는 동사에 온 말이다. '쇠'가 문제다. 이 '쇠'는 쇠(鐵)가 아니다. '쇄(鎖)'에서 온 말이다. 고어에서는 이 '쇄'를 '솨'라고 중국음으로 발음했다. 1463년 발간한 법화경언해에 '鎖난 솨주리라'라고 한 것이 첫 용례이다. 이 말은 '쇄는 쇠줄이다'라는 뜻이다. 이래서 초기에는 걸쇠를 '걸솨'라고 쓰게 된 것이다. 근대국어 시기에 오면 '걸쇄, 걸새' 등으로 쓰였다. '걸쇄'는 '걸-'에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쇄(鎖)'가 결합한 것이다. 현대국어 '걸쇠'는 '걸쇄'에서 제2음절의 모음이 'ㅙ'에서 'ㅚ'로 변한 것일 가능성도 있고 '열쇠, 자말쇠' 등에 유추되어 동사 '걸-'의 관형사형과 명사 '쇠'가 새로이 결합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정말로 걸쇠를 닮아서 걸쇠오름이라 했다면, 걸쇠의 한자표기를 도입하여 걸쇄악(乬鎖岳), 걸금악(乬金岳). 걸금악(㐦金岳)이라는 표기도 나타날 법한데 왜 그러지 않는지 검토해 볼 일이다.

본 기획 지난 63회 내용 중 오류를 정정한다. 하례리에 있는 걸세오름에 관한 내용 중 사진 설명에서 옛 건물을 비석 돌을 캐던 석공들의 숙소건물이라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 건물은 1963년 창건한 금유사(金悠寺) 건물이다. 지역에서는 매우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1973년 유실(流失)로 폐사되었다. 이 절이 현존했던 시기는 상당 부분 비석 돌을 캐던 시기와 일치할 것이지만 석공들의 숙소는 아니다. 이 절은 1976년 망장포에 보타사(普陀寺)라는 이름으로 재창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류를 지적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해 주신 하례1리 허지성 이장님께 감사드린다.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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