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81] 3부 오름-(40)물영아리는 물이 있는 오름, ‘돌오름’에서 기원

[제주도, 언어의 갈라파고스 81] 3부 오름-(40)물영아리는 물이 있는 오름, ‘돌오름’에서 기원
영아리? 영(靈)이라 쓰고 '달'이라 읽는다
  • 입력 : 2024. 05.14(화)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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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靈), 신령스럽다? 잔잔하다? 본래의 뜻과 거리가 먼 해석들


[한라일보]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산189번지다. 표고 508m, 자체높이 128m이다. 산정부에 둘레 300여 m, 깊이 40여 m, 바깥둘레 1000여 m의 분화구가 있다. 오름의 이름 유래에 대해서 제주의 오름이라는 책에는 '오름 정상에 분화구가 있어 늘 물이 잔잔하게 고여 있다는 데서 연유한 이름이라 한다'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靈(영)이라는 글자에 '잔잔하다'라는 뜻도 있었나? 이 외로도 신령 령(靈) 자에 견인된 그럴싸한 전설도 있다.

물영아리(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 분화구호, 이 오름을 물영아리오름이라고도 한다.

1653년 탐라지를 비롯한 고전에 나오는 이름을 모아보면, 물영아리악(勿永我里岳), 수령악(水靈岳), 수령알이(水灵謁伊), 수령와이(水靈臥伊), 수영악(水盈岳), 영아악(靈峨岳), 영악(盈岳) 등 7개다. 모두 물영아리를 한자로 표기하려고 한 글자들이다. 후부 요소로 아리(我里), 알이(謁伊), 와이(臥伊), 아(峨) 등은 모두 '아리'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오름의 고어형의 하나다. 즉 오늘날은 '오름'으로 굳어졌지만, 옛날에는 물장올에서 보이는 '올', 테역장오리의 '오리', 절우리의 '우리'로도 썼다. 몽골어에서, '올' 또는 '울', 러시아어에서 '울라', 만주어에서 '알린' 등으로 쓴다. '아리'는 이 중 하나다. 본 기획 22~24회의 오름의 기원을 참고하실 수 있다.

이 말을 빼면 공통으로 나타나는 말은 '영'이다. 靈(영)과 (영)은 같은 글자다. 예외적으로 盈(영) 자가 나타난다. 이 말 역시 영(靈) 발음을 쓰려고 동원한 글자다. 문제는 영(靈)이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잔잔하다거나 신령스럽다는 말일까?



영(靈), 한자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신비한 한자


똑같은 지명이 또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 산24번지 영아리오름이다. 표고 693m, 자체높이 93m이다. 1899년 제주군읍지에 영알악(灵謁岳) 등 고전을 통틀어보면 9개의 지명이 추출된다. 그중 영아리악(靈阿里岳), 영아이악(灵阿伊岳), 영아이악(靈阿伊岳), 영알악(灵謁岳) 등 4개는 영(靈)을 공통적으로 사용하면서 영아리를 음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아리(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 분화구호, 물영아리에 대응해 서영아리라 하기도 한다. 김찬수

용란악(龍卵岳), 용안악(龍眼岳), 용와악(龍臥岳), 용와이악(龍臥伊岳), 용왈이악(龍曰伊岳) 등 5개는 용(龍)을 사용하면서 용아리를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중 용란악(龍卵岳)과 용왈이악(龍曰伊岳)은 용아리오름, 용와악(龍臥岳)과 용와이악(龍臥伊岳)은 용눈이오름을 나타내려고 쓴 것이다. 여기서 용(龍)자 돌림의 5개 지명은 위의 영(靈)자 발음의 와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용란악(龍卵岳)과 용왈이악(龍曰伊岳) 같은 예에서 용란악(龍卵岳)은 용알이오름을, 용왈이악(龍曰伊岳)은 용와리오름을 나타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지명들은 모두 이의 유사음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남원읍 수망리의 영아리오름과 안덕면 상천리 영아리오름은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이 두 오름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분화구에 물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 오름 지명에 왜 영(靈)자 들어있을까 하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막연히 '신령스럽다'거나 '모른다'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냥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회피해 버린다. 해답은 바로 이 두 오름의 공통된 특징 물에 있다. 여기에 쓰인 영(靈)이란 한자는 오늘날 한자 자전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있다.

영(靈)자는 신령 령 자다. 신령은 神靈(신령)이라고 쓴다. 그런데 지명에선 돌(달)로도 쓴다. 신기한 일이다. 백제 지명에 나오는 예가 있다. 영암(靈巖)과 마령(馬靈)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영암군 본 백제 월나군 경덕왕개명 금인지(靈巖郡本百濟月奈郡景德王改名今因之)'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마령군 본 백제 마돌 일운 마진 일운 마등량(馬靈郡本百濟馬突一云馬珍一云馬等良)'이라는 말도 나온다.



백제 영암(靈巖), 신라 고령(高靈)에 쓰인 영(靈)


위에서 영암(靈巖)은 백제 때에는 월나(月奈)라 했으므로 영(靈)은 달이라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마령(馬靈)은 백제 때 마돌(馬突)이라 했다는 것 역시 영(靈)은 달(突)이라 했다는 것이다. 달(달)과는 전혀 무관한 듯한 영(靈)자가 月(달)/突(돌)과 대응 표기되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한자 영(靈)은 음과 훈 어느 쪽으로 보아도 달(달)과 유사한 어형으로 읽힐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언어란 특정 언어사회에서 완벽하게 독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많지 않다. 이런저런 과정으로 퍼져나가고 상속하면서 변형되기도 한다. 이 영(靈)자를 드라비다어에선 '달'로 발음한다.

영(靈)이 지명 표기에 동원된 예는 그 외로도 찾을 수 있다. 신라지명 영동(靈洞), 영산현(靈山縣), 영지향(靈池鄕), 영주(寧州), 영월(寧越), 영취(寧鷲), 고령(古寧), 고령(高靈) 등을 비롯하여 백제의 영광(靈光), 영암(靈巖)에서 발견된다. 남부지역에 국한하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가야국의 건국신화와 함께 고대 인도의 드라비다어 유입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이 글자는 그저 '달'로 읽었을 뿐 뜻과는 관계없다.

수령악(水靈岳) 혹은 영아리의 '영(靈)'은 한자를 이렇게 썼을 뿐 '달'로 읽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아리오름이란 '돌오름'에서 기원한다. 돌오름은 물이 있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본 기획 73회를 참조하실 수 있다. 물영아리의 '물'은 덧붙은 것이다. '영(靈)'이 물이라는 뜻임을 잊지 말라는 취지라고나 할까.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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