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문태준
[한라일보] 나목(裸木)의 가지에 얹혀 있는 새의 빈 둥지를 본 지 여러 철이 지났다
아무 말도 없이 가신, 내게 지어놓은 그이의 영혼 같은 그것을 새잎이며 신록이며 그늘이며 낙엽이 덮는 것을 보았다
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예전의 그이를 흙으로 거짓으로 다시 덮는 일에 지나지 않을 뿐
나는 눈보라가 치는 꿈속을 뛰쳐나와 새의 빈 둥지를 우러러 밤처럼 울었어요
삽화=배수연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내게 준 세상은 나목(裸木) 근처이며, 예전의 "그이"가 주변 나의 행보에 존재한다는 게 하나도 이상할 리 없다. 이 세상이야말로 내가 "여러 철"을 지날 수 있는 유일한 시공간이며, 죽음과 신생을 앗아가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나간 삶은 더는 말이 없지만 죽음의 입을 막는 것은 본질적으로 침묵이며, "내게 지어놓은 그이의 영혼 같은" 다소곳한 집의 텅 빈 창틀 너머 보이는 시간은 인간의 눈엔 거의 보이지 않을 테다. 무슨 이별이 흙으로 덮으며 낙엽으로 덮어 사람을 울리나. 살아 있다면 말이지만, 마침내 이를 딱딱 마주치며 바들바들 떨며 가야 할 눈보라 길은 몇 개나 있는지 인간의 꿈은 분간하지도 못한다. 쓰러질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대로 계속 내 길을 가 신록을 만나면 신록 속에서 길을 잃고, 그 그늘 속에 실조각처럼 가벼워진 내 넋이 나갈 지경이 오면 새의 빈 둥지에 잠자는 '그이'의 침묵과 포개질 수 있을까. 나목 가지에 얹힌 빈 둥지 상태의 투신! 그러면 사랑을 믿겠는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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