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85)인기척-천수호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85)인기척-천수호
  • 입력 : 2024. 09.24(화) 03: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갓 결혼한 신부가 처음 여보, 라고 부르는 것처럼

길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불쑥 봉분 하나 나타난다

인기척이다

여보, 라는 봉긋한 입술로

첫 발음의 은밀함으로

일가를 이루자고 불러 세우는 저건 분명 사람의 기척이다

기어코 여기 와 누운 몸이 있었기에

뒤척임도 없이 저렇게 인기척을 내는 것

새 신부 적 여보, 라는 첫말의 엠보싱으로

저기 말랑히 누웠다 일어나는 기척들

누가 올 것도 누가 갈 것도

먼저 간 것도 나중 간 것도 염두에 없이

지나가는 기척을 가만히 불러 세우는 봉분의 인기척

삽화=배수연



무슨 이런 말이 있는가. "갓 결혼한 신부가 처음 여보, 라고 부르는 것처럼 불쑥 봉분 하나 나타난다" 라니. 갓 결혼해서뿐 아니라 나이 들어서도 '여보' 라는 부름은 그 불러세움은 첫눈 오는 날 눈발 위를 비행하는 어느 봉긋한 입술 같이 떨리지 않은가. 시인은 느낀다. "새 신부 적 여보, 라는 첫말이 엠보싱으로" 찍히며 차운 바깥 대기를 떨치고 다가오는 상큼함. 그 입김. 그 시절은 기억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어디서 "불쑥" 만나는 봉분의 인기척에서 그 시절은 소환되어 아련하게 현현한다. 여보, 라는 말이 사람의 아름다운 기척이었건만 지금은 죽은 사람의 기척이라는 것. 그게 일가(一家)라고 어디서 소식을 들었겠지만 하단 내리막길에 여보, 라는 말이 들리는 사람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시간이 깔깔거리는 모습을 보며 결혼식과 장례식을 거의 동시에 치르는 정도의 거리에서 우리는 사랑한다고도 하고 죽고 싶다고도 한다. 그래서 갓 결혼한 신부의 여보, 라는 말은 우리가 죽기 전에 먼저 잠이 드는지 모른다. 불을 채 피우지 못한 상태로. <시인>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960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