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15차 행사가 열렸다. 올해 마지막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백화동 마을을 출발해 전세미못을 거쳐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목장길을 걸으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다. 오승국 시인
파도처럼 일렁인 억새물결 장관숲길 지나 언덕같은 가메옥 올라4·3의 아픔 간직한 곳도 둘러봐
[한라일보] 달랑 한 장 남은 12월 달력이 외롭게 걸려 있다. 화사한 오월 봄날에 시작한 2024 에코투어가 11월의 마지막 날 오늘(30일), 15차를 끝으로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멈춘다. 오랜 무더위와 비날씨 속에서도 우리는 기꺼이 숲의 나무와 들꽃에 사랑의 언어를 전하며 자연과 인생의 행복한 일치를 서로 나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이맘때면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마음이 숙연해지곤 한다. 힘들었던 순간도 많았지만 흘러가버린 순간순간들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묵묵히 걸어온 우리의 동행을 응원하며, 따스한 기억으로 서로를 위로해 주는 우정이 있기에 우리들의 겨울은 더욱 따뜻할 것이다.
'2024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 마지막 여정은 백화동 마을, 윗밤오름, 용암길, 가메옥, 억새밭, 거슨세미오름으로 이어지는 13.5㎞의 드넓은 광야의 길을 걸었다.
실고사리
주홍서나물
특히 이날 트레킹은 조천읍 선흘리, 구좌읍 송당리로 이어지는 오름과 숲길, 거문오름 용암길, 은둔의 오름 가메옥과 광활한 송당목장의 억새밭 등 제주 중산간의 장엄한 대지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길이었다.
오늘의 첫발을 내딛는다. 백화동으로 불리기도 하는 선흘리 백화동(百花洞) 마을은 4·3 당시 15가호의 주민 80여명이 거주하는 화전 마을이었다. 군인 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마을은 잿더미로 변했고, 주민들은 윗밤오름 인근 벤벵듸굴로 피신했으나 토벌대에 발각되어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그 후 백화동은 끝내 재건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됐다. 현재 백화동엔 당시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골연못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옛 집터에는 대나무숲이 무성하다. 최근에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다시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
은조롱
화살나무
삼나무와 편백나무의 푸르른 숲과 자연림, 습지를 지나 윗밤오름 방향으로 들어섰다. 편백나무 잎이 조각으로 떨어져 금가루처럼 노랗게 펼쳐진 숲에는 고사리류인 양치식물이 자랄 뿐이다. 엄청나게 큰 다래덩굴이 오래된 삼나무 등목을 휘감은 모습이 기이하다.
정상부까지 펼쳐진 삼나무 숲을 치고 올라 윗밤오름의 정상에 섰다. 북쪽에 있는 알밤오름과 함께 형제 오름으로 불린다. 정상에서 분화구까지는 빽빽하게 자연림이 형성되었고, 북오름 너머 성산과 우도까지 한눈에 보인다. 오름 동쪽으로 하산하니 가을하늘 아래 파란물색이 수려한 전세미못이 있다. 특히 여름철엔 하얀 어리연꽃이 물 위를 가득 메워 장관을 이루고, 마름·택사·물달개비 등 다양한 수생식물들도 꽃을 피운다.
전세미못 근처에는 세계자연유산 지정의 근거가 됐던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시원이 되는 벤뱅듸굴이 있다. 이곳도 4·3 당시 선인동 사람들이 피신처였으나 토벌대에 발각되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털머위
구멍장이버섯
다시 숲길을 걷는다. 야트막한 언덕 풀밭에서 마지막 점심을 즐겼다. 트레킹의 땀방울 탓이기도 하지만 동행의 동무들과 나누는 정오의 식사는 입맛을 돋우었다. 마지막 에코투어를 아쉬워하는 산천단 참가자의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
곶자왈 함몰지역을 가로질러 용암길로 나선다. 활엽낙엽수인 서어, 졸참, 산딸, 때죽, 단풍, 참꽃, 쥐똥, 윤노리 나무가 울창한 자연림을 이루고 있다. 용암길은 거문오름에서 용암이 흘러간 길을 따라 만든 길이다.
용암길을 힘들게 빠져나와 걷다 보니 은둔의 오름 가메옥이 나타났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거칠었다. 비고가 28m 밖에 안돼 오름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깝지만 능선을 돌아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과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높은오름과 칡오름, 안·밧돌오름, 민오름, 거슨세미오름 등이 부드러운 곡선미를 자랑한다.
은빛 억새밭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광야를 걷는다. 만주벌판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송당목장을 잇는 길을 걸어 종착지인 거슨세미오름 주차장으로 향한다.
늦가을의 석별이 아쉬워 최백호의 노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입가에 맴돈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 옛일을 잊으리라 / 비라도 우울히 내려 버리면 /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한 해 동안 에코투어의 아름다운 길을 안전하게 이끌어준 박태석 님, 김병준 논설실장과 안전요원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함께 길을 걸었던 모든 동행자들, 내년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오승국 시인 <제주작가회의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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