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별도봉 정상에 올라 바라보면 남동쪽에서부터 시작하여 바닷가까지 유서 깊은 마을이라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많다. 조선시대 제주의 관문 역할을 했던 화북포가 있어서 그렇다. 만남과 이별은 세상사 드라마틱한 대목을 보여주는 마디마디이니 그럴 법도 하고. 이 섬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 안전과 보호 및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이 있어야 했다. 1678년 화북진성이 구축된다. 화북포에 도착한 숱한 배비장들의 눈에 비쳤을 모습은 크게 세 개의 정자가 보였을 것이다. 배가 출항할 수 있을지 바람을 기다리던 객사 환풍정, 북성 위에서 바다를 감시하던 망루인 망양정, 포구 안에서 출입관리 업무를 담당하던 영송정. 환풍정에 올라 사방을 살피니 망월루에서 한 쌍의 남녀가 이별을 슬퍼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이야기에서부터 배비장전은 시작된다. 바람이라도 좋아 배들이 많이 들어오는 날엔 시끌벅적 했을 것이다.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화북성조(禾北成操)에 나타난 화북포와 진성의 밀접한 관계를 보더라도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을 종합하면 이 알짜배기 마을의 출발은 속칭 '부루기' 부록마을에 약 900년 전 절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고 사찰이 생긴 뒤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차츰 거로 지역으로 마을 규모가 팽창하더니 고려 충렬왕 시절 탐라의 10현을 설치할 때 별도현이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최소 600년 전후로 바닷가 마을까지 그 영역이 넓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화북동은 두 개의 법정동(화북1동, 화북2동)과 6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동마을, 청풍(중마을), 금산(서마을), 거로, 황사평(황세왓), 동화마을이다. 여기에 7개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화북1아파트, 화북2아파트, 화북3아파트, 화북4아파트, 제주삼화휴먼시아, 제주삼화사랑으로 부영2차, 제주삼화LH 2단지 등이 들어서 있다. 인구가 2만3000명에 달한다. 두 세대 전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재일동포가 성묘차 고향을 찾았다가 상전벽해의 실상을 느꼈다고 할 정도다. 반농반어촌이었던 곳이 단기간 내에 공업단지까지 포함하는 도시지역으로 탈바꿈하였으니 그렇다. 여기에 앞으로 전개될 신활력어촌 사업으로 화북항이 면모를 일신하고 나서면 그 놀라움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고혁수 주민자치회장
고혁수 주민자치회장에게 화북동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특징적인 자부심을 묻자 한참을 생각하다가 간명하게 대답하였다. "극복에너지." 그 어떤 지역보다 포용을 통한 발전 시너지효과를 창출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다. 단순하게 진취적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시대변화가 파생시킨 역경과 난관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온 마을공동체 속성은 역사적으로 섬 제주의 관문이라는 개방적인 공간에서 살아오며 외부와의 접촉이 활발하였기에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유전적 강점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획일적인 논의구조보다 입체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21세기 사회경제적 환경에 더욱 민감하게 대처하고 수용할 수 있는 역량이 이미 체질화 되어져 있는 곳.
아직도 화북포구에서 해신제를 올리고 축제로 승화시킬 정도의 전통적 마인드가 굳건하고, 미래지향적 발전 욕구가 넘쳐나기에 마을 주민들 스스로가 자부심을 가지고 숨기지 않은 슬로건이 있다. '미래를 향하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화북포구를 둘러싼 옛 취락 구조가 지니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절묘하게 경제적 관점에서 승화시켜 나갈 비전이 제시된다면 그 어느 지역보다 품격 있는 주거공간이요 풍부한 스토리텔링 자원을 자양분으로 경제적 활력이 넘치는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 호방한 문인 임제(林悌)가 제주를 여행하며 쓴 기행문 남명소승에서 화북포를 배경으로 한 글이 있다. '삼월이라 삼짓날/ 복사꽃 활짝 피어/ 돛단배들 두둥실 바다를 건너오면/ 곱게 단장하고 별도포에 나아가/ 해지는 언덕 위를 노닐다가/ 팔짱끼고 돌아온다네' <시각예술가>
비석거리의 의미<연필소묘 79cm×35cm>
별도봉 동쪽 동주원에서 별도천을 따라서 곤을동 방면으로 내려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비석 13기가 있다. 단순하게 아무 의미를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런 비석들이지만 이렇게 여러 개의 비석들이 줄지어 서있는 연유를 알게 되면 화북이라는 지역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 곳이었는지 파악된다. 주로 19세기에 만들어진 비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욕의 소산이다. 화북포에서 내려서 제주성안으로 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을 골라 세웠다는 것은 저급한 벼슬아치들에게 있었던 공명심의 소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화북지역이 보유하고 있는 역사적 위상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극명한 것이 없어보여서 그렸다. 사람과 물자의 통로에는 이러한 자기자랑도 끼어들 구석이 있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지혜요 유교적 사고방식과 공공미술의 속성이 결합된 놀라운 비석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묘사력을 총동원한 것은 기와지붕 형태의 덮개석을 올린 큰 비석이 그 주인공이다. 마을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저 비석엔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짐승의 발자국이 찍혀있는 형상석이라는 것이다. 경이로운 돌을 누구나 지나며 구경하라고 비석의 형식을 빌어 전시하였으니 놀라운 미술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욕심을 배격하고 방지하기 위하여 비석이라고 하는 방식으로 세상사람들의 공유물로 만들어버린 놀라움을 그렸다. 그러한 마인드가 희소가치로 판단한다면 문화재다.
두 개의 방파제<연필소묘 79cm×35cm>
두 개의 방파제를 그려서 이 유서 깊은 마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상징하고자 하였다. 화면 구조로 보면 모두가 수평선 안에 있다. 그 수평선을 하늘 아래 있고. 가까이 있는 방파제는 필자가 유년시절 수영하며 놀던 참으로 많은 사연과 추억을 간직한 곳이다. 등대는 원래 저 현무암으로 구축된 방파제 위에 있었다.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등대불을 바라보며 경이로운 상상의 나래를 펴던 곳. 얼마나 사연이 많은 역사적 포구라는 사실을 모르고. 두 세대 전의 모습을 알고 있는 눈으로 저 포구를 그리는 마음은 참으로 감회가 깊었다. 저 멀리. 옛날에는 해녀들이 물질하던 바당밭이었던 곳에 현대식 공법으로 토목공사가 이뤄진 방파제는 그 위용이 대단하다. 2010년에 완공되었다는 저 모습은 또 하나의 역사적 변곡점이면서 두 개의 화북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반농반어촌의 모습으로 살아온 세월과 엄청난 규모로 발전해버린 오늘날의 모습이 방파제의 규모나 위치에서 확연하게 대비되고 있으니 그러하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모습이 이러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며 그린 것. 화북이라는 역사적인 마을이 추구하는 지향점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이 두 개의 방파제를 통하여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지나간 것은 쓸모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허접한 속물근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화북포구, 아니 화북항의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섬 제주의 관문으로서 역사적 의무를 오랜 기간 해온 장소에서 그림이 설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만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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