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백지(白紙)를 선물하는 사람들

[열린마당] 백지(白紙)를 선물하는 사람들
  • 입력 : 2026. 06.22(월) 01:00
  • 한민영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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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행정 전산화가 완벽해진 요즘도 공직자들의 책상 위에는 늘 ‘A4 용지’가 놓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눈부시게 하얀 종이. 우리는 매일 그 하얀 벌판 위에 누군가의 민원을 적고, 새로운 정책을 그려 나갑니다.

흔히 ‘청렴’이라고 하면 검은 돈을 거절하거나 편법을 저지르지 않는 ‘ 깨끗한 상태’를 떠올립니다. 마치 하얀 종이에 먹물이 튀지 않게 조심하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진짜 청렴은 그보다 훨씬 역동적입니다. 청렴은 단순히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내 안의 욕심과 편견을 끊임없이 지워내어 국민 앞에 언제나 ‘완벽한 백지’로 서는 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색깔의 안경을 씁니다. 지연과 학연이라는 친근한 색, ‘전에도 이렇게 했으니 문제없다’는 타성의 색,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안일함의 색. 만약 공직자가 이런 색깔이 묻은 마음으로 국민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한 정책이라도 그 안경을 거치는 순간 왜곡되고 얼룩지고 맙니다.

진짜 무서운 부패는 검은 돈을 받는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닙니다. 내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오만, 익숙한 이들에게 은근한 편의를 베푸는 마음의 틈새, 그리고 ‘원래 행정은 그런 것’이라며 국민의 불편을 외면하는 무감각입니다. 이 투명한 얼룩들이 모여 결국 공직 사회 전체의 신뢰를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청렴한 공직자란, 매일 아침 출근길에 마음의 지우개를 드는 사람입니다. 어제 가졌던 선입견을 지우고, 나에게 유리한 조건을 지우고, 오직 마주 앉은 국민의 목소리만 온전히 받아적을 수 있도록 자신을 텅 비워내는 것입니다. 내가 비워질 때 비로소 국민의 이야기가 왜곡 없이 투명하게 담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켜내는 청렴은 단순히 나 한 몸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한 도덕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공정하고 편안한 ‘백지’를 국민에게 선물하는 일입니다. 억울한 사람도, 힘없는 사람도, 빽 없는 사람도 누구나 찾아와 자신의 억울함과 희망을 마음껏 적어 내려갈 수 있는 그런 하얀 도화지 말입니다.

오늘도 내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종이를 바라봅니다. 이 눈부신 투명함이 내 마음에도, 그리고 우리 공직 사회 전체에도 물들기를 바랍니다. 편견을 지우고 욕심을 비워낸 우리들의 ‘백지’ 위에, 국민들은 비로소 ‘신뢰’라는 가장 아름다운 글씨를 적어줄 것입니다. <한민영 서귀포시 대천동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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