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녀를 말하다 4부] 제주해녀 구술사 (4)부산 영도에서 만난 안덕 출신 고승여 씨

[한국 해녀를 말하다 4부] 제주해녀 구술사 (4)부산 영도에서 만난 안덕 출신 고승여 씨
"힘들고 괴로웠던 물질 이젠 편안하고 힐링돼"
  • 입력 : 2026. 09.21(월) 03:00
  • 양유리 기자 glassy3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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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해녀생활을 들려주고 있는 고승여 씨. 장태봉기자

엄마 따라 20대부터 물질… 강원도에서 첫 시작
결혼 후 1990년대 중반 부산으로 이주해 생활
동료해녀들과 2000년대 일본에서 물질하기도




[한라일보] "해물라면 하나에 성게알 김밥 두 줄 주문이요~"

부산 영도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영도해녀촌 식당. 외국인 관광객의 주문을 받기 위해 한 70대 해녀가 1m가 넘는 손가락 지시봉을 꺼내 들었다. 메뉴판에 있는 음식 사진을 가리키자 손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손짓으로 개수를 확인한 뒤 동료 해녀들에게 주문을 전달했다.

옛날 해녀생활을 들려주고 있는 고승여 씨. 장태봉기자

부산 영도 앞바다.

영도해녀촌은 해녀들이 직접 바다에서 건진 해산물로 만든 메뉴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이곳에서 일하는 해녀 대부분은 제주 출신으로,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한 출향해녀들이다.

해녀촌에서 만난 고승여(77) 씨의 고향도 제주다. 현직 해녀로서 해녀촌 식당일을 겸하고 있는 그는 일손이 부족해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며 몇 차례 인터뷰를 사양했지만 잠시 시간을 내 자신이 겪은 해녀 생활의 고됨과 그 속에서 느낀 자부심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고씨는 1950년생으로 남제주군 안덕면 대평리(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감산리 일대)에서 태어났다. 고씨처럼 바닷가 마을에 살던 소녀들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물질을 익혔다. 해녀를 업으로 삼지 않아도 친구들과 바다를 헤엄치며 전복과 소라를 땄다.

스무 살이 되던때 고씨는 고향 제주를 떠나며 진로 고민이 깊어졌다. 일반 직장생활도 고민했으나 해녀였던 엄마를 따라 타지에서 해녀 생활을 시작했다. 직업인으로서의 첫 물질은 21살 때였다. 경남 통영의 소매물도와 강원 덕산 등지에서 주로 작업했다.

첫 정착지는 강원도였다. 고씨는 강원도에서 물질을 했고, 그곳에서 오징어배를 타던 제주 출신 남성과 결혼했다. 이처럼 강원도에서는 제주 출신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남편이 오징어잡이에 종사하며 정착한 사례가 확인된다.

제주대학교 영주어문학회가 펴낸 '영주어문(2005.08)'에는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은 거의가 제주 해녀로, 나머지 지방해녀들도 제주 해녀들에게서 기술을 습득하며 배웠다. 남편은 오징어잡이로, 아내들은 물질을 하기 위해 왔다가 어업권을 획득해 정착한 해녀들이 대부분"이라고 언급됐다.

강원도에서 약 20년 간 지낸 고씨 부부는 1990년대 중반 부산으로 이주했다. 남편의 수입이던 오징어배의 벌이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항구가 발달한 부산에서 외항선을 타기로 결정했다.

고씨는 지역을 옮기고 난 뒤에도 물질을 이어갔다. 다만 부산 해녀회에 가입하기까지는 약 2~3년이 걸렸다. 그 기간에도 고씨는 해녀회가 관할하지 않는 바다를 찾았다. "가입이 안 돼도 난 능력이 있으니까 물질을 계속했지. 봉래동에서 새벽 4시에 배를 타고 나무섬, 형제섬, 외섬(모두 무인도)에 나가서 작업했어."

해녀촌 주문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은 자갈치 시장에서 인기가 좋았다. 고씨는 "우리 물건이 싱싱해서 자갈치 시장에서 물건을 다 받아갔다"며 "시장에 제주 사람이 많았는데 단골집이 있어서 문어, 소라, 굴, 돌멍게를 팔아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상군해녀로서 물질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동료 해녀들과 함께 2000년대 일본으로 출향물질도 나갔다. 한 번 출향하면 일본에 약 3개월 정도 머물며 물질을 하고 제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일본에 한 번도 안 가봐서 가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친구들한테 데려가라고 했지. 일본 물은 맑아서 좋더라고. 근데 말이 안 통하고 숙소가 외딴 데 있어서 어디 다닐 수가 없었어. 그저 작업하고 물건 잡으면 오야가다(현지 고용주)한테 넘기고 집에서 쉬기만 했어."

고씨가 마음속으로 정한 은퇴 나이는 60세였다. 베테랑 해녀에게도 물질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남편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 셋 장가는 다 보내야 했다"던 고씨는 자신이 정한 은퇴 나이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바다로 향하고 있다.



바다한테 고마울때 많아
돈 없어도 바다에 가면 돈이 나와…


해녀로 일하며 오랜 시간 가족의 생계를 이끌었으나 힘든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해 묻자 고씨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졌다. "우리 막냉이는 언제 한 번 그러더라고. 결혼하고 살아보니 엄마 참 장하다고. 엄마 직업도 좋지만은 정말 강인한 사람이라고. 뭉클했어."

그에게 바다는 가족을 먹여 살린 '고마운 은행'이자 자부심을 안긴 공간이다. 지금도 일주일에 나흘은 물질에 나선다.

"바다한테 고마울 때가 많아. 오늘 돈이 없어도 바다에 가면 돈이 나오니까. 은행이 따로 없어. 어릴 땐 물질하기도 싫고, 남들은 얼굴이 뽀얀데 해녀들은 다 시커매서 속상하기도 했어. 그래도 덕분에 아이들 키우고, 먹고사는 걱정 없었지. 이젠 바다에 가면 편안하고 힐링돼."

뿐만 아니라 바다는 해녀 공동체도 남겼다. 동료 해녀들과 동고동락하며 괴로운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여전히 그는 주말이면 친구들이 있는 해녀촌으로 출근한다.

"어릴 땐 아이들이 있었고, 지금은 해녀들이랑 여기서 일하니까 외롭지 않아. 이런 일상이 좋아. 80살 될 때까지 아프지 않고 재밌게 물질하다가 그만두는 거. 그게 꿈이야." 특별취재팀=양유리 기자·장태봉 기자(사진·영상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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