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연의 문화광장] 해류에는 국적이 없다

[이나연의 문화광장] 해류에는 국적이 없다
  • 입력 : 2026. 10.06(화) 02:00
  • 이나연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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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지난달 전시공간 '새탕라움'에선 이지유의 물과 불 이야기가 들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사람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겪은 일이지만 아버지는 이제 여기 없으므로 아들이 대신 말하는 중이었다. 대마도의 어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해안에 떠밀려 온 주검들을 거두어 태우고 묻었다고 했다. 제주에서 죽은 사람들이었다.

해류에는 국적이 없다. 제주와 대마도 사이의 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흐르고, 1948년 이후 제주에서 벌어진 일에 국가가 오랫동안 이름조차 붙이지 않는 동안에도 바다는 그 사실을 매일 건너편 섬으로 실어 날랐다. 관할은 나뉘어 있어도 밀려오는 것은 나뉘지 않는다. 일본의 서쪽 끝이자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인 그 섬은 양쪽 어디에서도 중심이 아니었고, 제도가 뒤늦게 도착한 자리에서 먼저 삽을 든 것은 동네 사람이었다.

그가 한 일은 그저 묻는 것이었다. 누구인지 모르고 알릴 곳도 없는 채로 묻었고, 세월이 흐른 뒤 아들이 위령비를 세웠다. 주검이 닿았던 해안도 아니고 공공의 부지도 아닌 자기 사유지에 자리를 내어 비를 올린 것이다. 유족도 국가도 치르지 못한 장례를 낯선 나라의 이웃이 대신 치렀고, 그 기억을 세워 둘 땅까지 제 몫에서 떼어 주었다.

이지유가 지난 2년 동안 대마도를 오가며 모은 것이 이 이야기다. 개인전 '물과 불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눈이 머무는 사진은 주검들이 닿았던 해안을 찍은 것인데, 검은 바위와 흰 거품뿐 파도가 쓸어 간 뒤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사진은 무엇을 보여주는 대신 무엇이 없는지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두 번 사라진 셈이다. 한 번은 제주에서, 한 번은 대마도의 해안에서.

불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어두운 숲을 찍은 커다란 화면 속 작은 빛은 숯을 굽던 자리고, 그 일을 한 것은 바다를 건너간 조선 사람들이었다. 나무를 베어 가마에 넣고 여러 날 불을 지키는 일은 사건이 아니라 생업이며, 역사가 아니라 살림이다. 전시는 두 이야기를 끝내 하나로 합치지 않는다. 같은 해협이 한쪽에게는 무언가 밀려오는 방향이었고, 다른 쪽에게는 자신이 건너간 방향이었다.

그러면서도 두 이야기는 끝에 가서 같은 두 원소로 모인다. 물에 실려온 몸은 불에 맡겨졌고, 산에서 불을 지피던 사람들은 그 불을 물로 꺼 가며 하루를 마쳤다. 다만 숯을 굽는 불은 태워 없애는 불이 아니라 나무를 검은 덩어리로 남기는 불이고, 숯은 썩지 않는다. 물이 지우는 동안 불은 남긴다. 묻힌 자리는 쓸려 나갔고, 일하던 자리는 검게 남았다.

작은 작품들은 벽이 아니라 바닥에 흩어져 있어서 보려면 몸을 굽혀야 했다. 눈높이에 걸린 것이 감상의 대상이라면 발밑에 놓인 것은 다른 자세를 요구한다. 파도에 밀려온 것들이 닿는 자리이고, 무엇보다 묻는 사람의 자세다. 답을 주는 전시는 아니었지만,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가장 오래된 두 원소 앞에 나란히 내려놓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자리가 있었다. <이나연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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