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특별취재팀이 2005년 11월 일본 고베지역 고요엔 지하호를 취재하고 있다./사진=이승철기자
제주전역 방어기지화 위해 강제동원일본군사령부 작전 따라 군사시설 구축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60여 년 전에 구축된 제주도 군사시설과 노무·병력동원의 실태에 대해 정부 위원회 차원의 첫 직권조사보고서라는데 의미가 있다. 진상규명위는 직접 제주방문 조사와 생존자 증언 및 한라일보 등에서 진행하고 있는 조사 등을 토대로 강제 노무동원과 징용, 군사시설 구축 실태 등을 파악했다.
▲전남 해남 옥매산 광산 광부들이 동원돼 갱도진지가 구축된 산방산./사진=이승철기자
진상규명위는 보고서에서 제주도 군사시설물 구축의 큰 틀은 일본군사령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정해졌으며, 총독부와의 긴밀한 협의 아래 인력, 자재, 식량 등의 조달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군사시설물 공사는 일본군이 직접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고, 하청업체가 청부를 맡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제주민들은 최하 13세의 어린나이부터 동원된 것으로 나타났다. 진상규명위는 군사시설물 구축과정에 동원될 때 대상연령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2005년 접수된 피해신고 당시 생존자 1백74명을 대상으로 동원유형과 실태 등을 토대로 이같이 밝혔다. 나이가 어려도 부친 대신 동원되거나 마을별 할당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강제 동원돼 군사비행장과 갱도 등 군사시설 구축에 시달려야 했다.
▲취재팀이 2006년 12월 목포에서 옥매산 광산 조난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백운씨(오른쪽)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승철기자
제주도 주민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알뜨르비행장 등 네 곳의 비행장이다. 즉 알뜨르비행장에서는 1939년 무렵부터, 정뜨르비행장은 1942년부터, 진드르비행장은 1943년 말이나 1944년 초반 무렵에 비행장 터닦기와 군인막사 건축 등에 주민이 동원됐다. 1944년 말 부터는 오름이나 해안가의 갱도진지 구축에 배치된다.
진상규명위는 당시 일제에 의해 제주도민 4만여 명이 동원됐다고 추산했다. 당시 한 호당 한 명 이상 동원됐기 때문에 그때 제주인구 21만 여명, 호수는 4만여 호인 점을 감안하면 4만여명은 일단 동원대상자로 파악했다. 당시 제주도 전체인구의 5분의 1 정도가 강제동원으로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처우나 근무조건은 열악하기만 했다. 대부분의 주민은 1년에도 3~4차례 동원되어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작업에 대한 임금은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진상규명위는 또 당시 무임금과 교대동원으로 인해 경제적 피해와 함께 잦은 부상과 사고로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빈번했다고 밝혔다. 생존자 1백74명 중 사고나 질병 감염 등의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11명(19.14%)이고, 그 외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린 사례가 많다.
제주도지역 군인·군속 등 병력동원은 노무동원과는 달리 강제동원의 특수사례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동원된 군인은 대다수가 전투병력이 아닌 비전투병력으로 동원되어 제주 전역을 방어기지화 하는데 투입됐다. 이들의 부대명은 '조선제7450부대'로 한라산을 중심으로 갱도 구축과 해안지역 특공기지 구축 등 작전수행을 위해 편성된 부대다. 이들은 어승생악과 모슬포 성산 등 일대에 가장 많이 동원됐다. 이들의 처우는 매우 열악했고, 빠른 시간 안에 수많은 갱도 등의 구축에 동원되면서 가혹한 노동으로 고통을 받았다.
진상규명위는 또한 제주도민 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제주 이외 출신들도 군사시설물 구축에 동원됐다고 밝혔다. 광산광부들의 굴착경험을 활용하기 위해 현재 9개 정도의 광산에서 동원된 것으로 파악됐다며,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광부들은 주로 1945년 초반에 집중적으로 동원됐고, 농업종사자 등도 다수 동원되어 부족한 노동력 보충용으로 활용했다.
또한 이들은 제주로 동원되는 과정에서 전염병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고, 실제 귀환과정에서는 조난 사고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대표적으로 '옥매산광산 노동자 조난사건'의 경우 1945년 8월 20일 제주를 출발 목포로 귀향하다 1백20여명이 선박화재로 조난당했다고 밝혔다.<본보 2006년 12월 7일자 5·7면, 2007년 1월11일자 1·7면>
진상규명위는 앞으로 일본이 전쟁말기 제주도에 왜 그렇게 많은 갱도진지 등을 만들었으며, 어떤 형태의 시설물을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 파악돼야 한다고 밝혔다. 제주도는 물론 한반도 전체 군사시설물 구축현황이 파악돼야 한다는 것.
또한 일본군이 제주도에 구축한 군사시설물 현황과 용도 조성시점, 위치비정 및 주둔부대 등 전체적인 조명이 필요하고, 보존 및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태평양전쟁 시기에 7만5천여 명에 이르는 일본군이 제주에 주둔하면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고 일본토사수를 위해 제주도민 등을 강제 동원 수많은 갱도진지와 특공기지 등 군사시설을 구축했으나 아직껏 실태파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별취재팀=이윤형·표성준·이승철기자
인터뷰 / 이병례 진상규명위 전문위원
실태 규명 · 역사적 의미화 작업 필요
"제주도내에 구축된 일본군 군사시설의 실태 뿐만 아니라 용도 등 성격을 규명하고 앞으로 역사적 의미화 하는 작업이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번 보고서의 조사책임자인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이병례 전문위원은 "제주도 일본군 군사시설의 경우 위원회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직권조사에 착수 보고서를 펴내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문위원은 인력이나 재정이 부족해서 제주현지에서 많은 조사를 하지못해 아쉬움이 있지만 이번에 생존자들을 면담하고 그 면담내용을 일반화시켜 제주도민 뿐 아니라 다른 지방 사람들까지 상당수 동원됐음을 어느 정도 밝혀낸 것은 나름대로 수확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갱도진지 등 일본군 군사시설 구축시기와 어느 시설물에 어느 정도 노무동원이 이뤄졌는지 표본 제시는 가능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 전문위원은 남해안 지역의 경우는 소규모인데다 거의 일직선 형태인데 반해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시설은 규모도 크고 구조도 복잡하다며 이는 제주도가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라일보 등 제주현지에서 조사를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지만 이를 통해 일본군 군사시설의 위치와 용도 등 실태가 밝혀져야 한다"며 "그러면서 역사적 의미화 하는 작업과 보존 활용방안까지 모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윤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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