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 쓰게마씨](17)허성수 제주어보전회장

[제주어 쓰게마씨](17)허성수 제주어보전회장
토종 풀꽃같은 제주어에 거름을
  • 입력 : 2008. 08.14(목)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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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풀나무로 숲을 이룬 도심 '자연학습장'에서 만난 제주어보전회 허성수 회장. 그는 제주말로 부르던 풀꽃 이름이 가물가물해지듯 제주어도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휩쓸릴 것이라는 생각에 민간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제주어보전회를 꾸렸다. /사진=김명선기자

지난 1월 창립 전국 30~70대 연령 회원 참여

마을별 제주어지킴이 운영 장기과제로 세워



이름모를 풀과 꽃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한 걸음만 옮겨놓으면 아스팔트를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꼬리를 무는 곳인데 말이다. 회색 콘크리트숲에도 그렇듯 초록빛이 숨어있었다. 섬의 빛깔을 잃은 언어들이 어지러이 춤추는 속에서 살가운 제주어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제주시 오라2동에 있는 '자연학습장'. 그곳에 한여름 모기떼에 뜯겨가며 꽃과 나무에 물을 대고 김을 매는 사람이 있다. 제주어보전회 허성수 회장(65)이다. 2000년부터 이 땅의 풀꽃 따위를 한데 모은 어린이 체험 공간을 만들어오고 있는 허 회장은 그 날도 땀을 쏟아내며 그 일에 매달려 있었다.

제주어보전회가 꾸려진 것은 지난 1월. 어느덧 반년을 넘어섰다. 창립때만 해도 1백명 정도에 불과하던 회원수가 지금은 1백80명에 이른다. 33세부터 78세까지 연령층이 두텁다. 농업인, 주부, 자영업, 교사, 연극인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다. 열성 회원들이 많다. 얼마전 한경면 용수리에서 열렸던 절부암음악회 행사장에서 '제주어=국보'라는 큼지막한 펼침막이 달린 승합차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차 주인이 제주어보전회원이란다. 서울에서, 경기도에서, 부산에서 제주어보전회에 가입한 이들도 있다.

"작년 제주어 세미나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이 축사만 하고 자리를 뜨는 걸 봤다. 제주어를 어떻게든 살리자고 말만 해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 '부에'('화'를 뜻하는 제주어)가 났다. 제주어 보전에 대한 구체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라."

허 회장은 그 길로 제주섬 구석구석을 돌면서 2백~3백명쯤 만났다고 했다. 머릿속에 맴돌기만 하던 생각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차츰 구체화됐다. 다들 제주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누군가 나서주길 바랐던 거다.

그들의 바람은 제주어보전회 창립으로 모아졌다. 학계, 교육계, 행정의 역할 말고 민간에서 해야 할 몫이 있을 터, 제주어보전회가 그 짐을 지기로 했다. 이즈막에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막바지 작업을 벌이고 있는 제주어보전회는 크고작은 사업을 구상하고 있지만 마을별 제주어 지킴이 운영을 큰 목표로 세워놓았다. 제주어 지킴이들이 지역별 어린이 교육, 제주어 수집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줄 거라 기대하고 있다.

'자연학습장'을 빠져나올 때쯤, 제주어보전회의 회원 몇몇이 찾아들었다. 새비낭(찔레), 소앵이(엉겅퀴), 맹게(청미래), 가신새(파리풀)처럼 그 공간 역시 잊혀져가는 제주어가 있는 곳이다. 생명력 질긴 풀꽃이 외래종에 가물가물해지듯 제주어도 그럴까 싶어 회원들은 그곳에 가면 식물의 이름을 가만가만 부르곤 한다.

"제주어는 오래지 않아 소멸될 위기에 있다. 이는 오로지 시류에 따른 상황이며 불가시적인 정신 세계를 홀대하고 방언을 열등하고 저급한 언어로 인식한 결과이다."

제주어보전회는 설립 취지문에서 그렇게 말했다. 제주의 언어에 제주의 정신이 담겼다는 생각. 제주어보전회원들은 그 뜻을 새기며 먼 길을 향한 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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