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7](2)소금밭-①잊혀진 소금밭의 역사

[해양문화유산을 찾아서-7](2)소금밭-①잊혀진 소금밭의 역사
염전 형성 불리한 지형 딛고 50년대까지 곳곳 짠내음
  • 입력 : 2010. 06.11(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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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애월읍 구엄리에 복원해놓은 '돌염전' 전경. 해안가 넓적한 바위에 동그라미 따위의 도형을 그려넣은 것 같은 황토빛 조형물은 소금을 얻는 과정에서 바닷물을 가둬놓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았던 물막이 장치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제주지역 강우일수 많고 모래 공급 해안 발달 안돼 소금 귀해
일제강점기 펴낸 '한국수산지'엔 도내 전역 23군데 염전 기록

제주올레코스 개장 현수막이 팔랑거렸다. 그 날은 휴일이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그 올레코스에 '구엄리 돌염전'이란 커다란 빗돌이 세워져 있다. 소금밭의 존재를 알리는 상징물이다.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잊혀졌던 소금밭의 역사가 이 마을에서 살아나고 있다.

▶백배나 공을 들여도 소금 소량 얻어

정광중·강만익의 논문 '제주도 염전의 성립 과정과 소금 생산의 전개'('탐라문화' 18호)에 따르면 우리나라 소금 생산은 일찍이 해수를 이용한 해염이 주를 이뤘다. 해수를 가마솥에 넣어 화력을 이용하거나 염전에서 일광에 의한 해수의 증발 과정을 통해 소금을 얻는 방법이다.

제주섬은 다른 지역과 달리 염전 형성이 불리한 지형으로 분류한다. 염전은 대체로 강우일수가 적고 사빈이 발달하며 연료가 풍부한 지역에 입지한다. 제주는 비오는 날이 많고 다량의 모래를 공급받는 전형적인 사질해안이 발달하지 못해 염전형성이 불리한 것으로 분석된다.

옛 문헌을 들여다보면 염전이 드물고 소금이 귀했던 제주섬의 형편을 말해주는 기록이 나온다. 김정의 '제주풍토록'(1520)에는 "서해처럼 전염을 만들자고 해도 만들 땅이 없고, 동해처럼 해염을 굽자고 하나 물이 싱거워서 백배나 공을 들여도 소득이 적다"고 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해안가는 모두가 암초와 여로 소금밭을 만들 만한 해변의 땅이 매우 적다. 또한 무쇠가 나지 않아서 가마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적어 소금이 매우 귀하다"고 썼다.

이런 배경에서 김상헌의 '남사록'(1602)은 제주에 언제부터 염전이 생겨났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자료다. '남사록'을 보자. "별방에서 정의까지 사이에 염전이 몇 군데 있다. 일찍이 충암록에 "땅이 큰 바다로 둘러 쌓였으나 소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기에 여러 지방민에게 물어보았다. 무오년부터 강려가 목사가 됐을 때 , 해변의 소금 나는 땅을 보아 잘 아는 사람을 가르쳐 육지 연해에서 바다소금 만드는 것처럼 시험해보았다. 한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 겨우 4~5두였는데 맛이 매우 썼다. 지금은 온 섬에서 일곱 군데 소금가마가 있어 충분히 관가의 주찬을 이어 댈 만하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이것을 쓸 수 없으며, 모두 육지에서 사와야 한다고 했다."

▶소멸의 길 걸었던 염전 구엄리에 복원

늦어도 16세기 이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지역 염전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한국수산지'를 통해 구체적 수치가 드러난다. 조선총독부농상공부편찬 '한국수산지'3집(1910)엔 그 무렵의 제주지역 염전 면적과 제염총액이 상세하다. 제주군, 대정군, 정의군으로 나눠 실린 염전수는 23군데에 이른다. 이들 염전 면적은 모두 합쳐 5만3059평(약 17만5402㎡)에 달하고 연간 생산량은 35만4326근(약 213톤)으로 집계된다. 염전평수만 따지면 종달리가 1만4357평(4만7461㎡)으로 가장 넓다. 종달염전은 연간 소금생산량도 8만9052근(53톤)으로 가장 많다.

'한국수산지'역시 제주가 소금을 만드는 데 불리한 지형적 조건임을 지적하고 있다. 암석 사이에 다소의 빈 공간이 있는 곳은 모래판이나 진흙땅을 가릴 것 없이 이를 개간해 염전으로 만들고 있는데, 심한 경우는 불과 1평 남짓의 공지에 염전을 만들어 '어린애 장난'같은 제염을 하는 곳도 있다고 적었다. 조사단은 "매년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소금으론 도민 수요의 절반을 채우기에 부족하다"며 주로 진도 부근에서 소금을 들여온다고 소개됐다.

제주지역 소금 생산은 1950년대를 전후로 소멸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있다. 해안 암반에서 소금을 얻어온 구엄리도 사정이 비슷하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대 무렵 염전이 그 기능을 잃게 된다.

하지만 '돌염전'의 남다름에 관심을 가져온 일부 마을 주민들은 소금밭의 역사를 쉬이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다. 국비와 지방비 지원을 받아 염전을 주요 테마로 정한 어촌체험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지난해 12월 마을 포구에 염전을 복원해놓았다. 돌염전 빗돌 아래 다시 주인을 맞은 소금빌레엔 하얗게 반짝이는 소금 알갱이가 앉아 있었다.

"소금빌레에 가족 생사…55년까지 소금 만들어"
구엄 돌염전 복원 참여 조두헌씨


15년이 넘었다. 그가 바다로 나서지 않은 지. 아버지가 어부였고, 그도 어부로 바다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구엄리 어촌계장을 지낸 조두헌씨(75). 눈앞에 걸리는 바다를 마주하며 살아온 그에게 '돌염전'에 얽힌 기억은 어제일처럼 선명한 듯 보였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빌레'를 소유해 소금 생산하는 일을 했습니다. 6·25가 끝난 뒤에는 판로가 없고 인력도 부족해 서서히 소금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 같습니다. 1955년쯤까지 소금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는 구엄리 소금밭을 두고 '빌레'라고 불렀다. '빌레'는 '지면 또는 땅에 넓적하고 평평하게 묻혀진 돌'을 뜻하는 제주어다. 해안가에 드넓게 퍼져있는 바위를 이용해 소금을 만들었던 터라 그렇게 칭했다.

소금을 만드는 일은 주로 여자들의 몫이었다. 바다와 밭을 오갔던 남자들은 일손이 부족할 때 소금 제작을 거들었다. 조두헌씨도 틈틈이 빌레로 나가 소금 만드는 일을 도왔다. 구엄에서 생산된 소금은 수산, 장전, 소길, 금덕, 용흥리 등 인근 중산간 마을로 팔려나갔다. 소금을 조나 보리와 바꿔오는 물물교환 방식이었다.

"소금 만드는 데 여간한 노동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15~20일 정도는 꼬박 지켜봐야 합니다. 농사도 안되고 수입원도 마땅치 않은 시절이라 소금 생산에 가족의 생사가 달려있었습니다. 힘들어도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됐죠."

구엄리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소금밭은 생업수단이 바뀌고 다른 지역에서 들어오는 소금이 늘면서 무용지물이 되어갔다. 염전의 흔적을 말해주는 물막이용 진흙 둑도 속절없이 바닷물에 씻겨나가버렸다. 그렇게 잊혀지는 듯 했던 염전은 50여년이 흘러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돌염전을 새로운 해양문화 상품으로 개발해보자는 뜻에서다. 조두헌씨는 고증을 맡는 등 염전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깨끗한 구엄 바다의 이미지를 담아낸 소금을 실제 생산해 관광상품으로 판매하는 게 목표입니다. 현재로선 인건비 확보가 과제입니다.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심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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