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떵살암수과]'밥상차리는 남자' 오성근씨

[어떵살암수과]'밥상차리는 남자' 오성근씨
"살림은 생명 키우는 거룩한 일"
  • 입력 : 2011. 12.16(금) 22: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표선면 하천리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차의 향기가 있는 공간을 운영중인 '살림하는 남자' 오성근씨가 '홈스쿨링'을 하는 딸과 함께 했다. /사진=강희만기자

딸 키우며 전업주부로
"육아는 부부 공동의 몫…이젠 나만의 시간 원해"

그의 명함에는 오래도록 '하우스허즈번드(househusband)'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한의원 컨설팅을 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살림을 선택한 그였다.

인터넷 카페 '밥상 차리는 남자'를 운영해온 오성근씨(47). 제주여민회가 주는 '성평등 디딤돌상'을 수상하는 등 남성 전업주부로 널리 알려진 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 '주부' 명함을 가졌을 것"이라는 오씨는 주변의 걱정어린 시선과 마주하며 전업 주부로 발을 디뎠다. 장인과 장모는 "우리 딸을 데려가 고생만 시키고 자네는 놀고 먹는가"라고 했고, 그의 부모들은 "며느리를 볼 면목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내 남성 전업주부가 20만명에 이른다고 하지만 '살림하는 남자'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낯선 존재로 여겨진다. 정작 오씨는 담담하게 집안 일에 나섰다.

"연애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갈까'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때 우리 부부가 약속한 것이 있다. 육아는 부모 공동의 몫이라는 것이다. "

결혼 6년만에 아이가 생겼고 그의 부인은 일을 계속하고 싶어했다. "당신이 여의치 않으면 내가 육아를 맡겠다"고 했던 오씨는 자연스레 그 약속을 지켰다.

하지만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키우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아이 데리고 수영장을 가든, 놀이터에 가든 남자는 대개 그 혼자였다. 주부 우울증처럼, 어느 더운 여름날 아기 기저귀를 삶다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 일도 있다. 그는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엄마만 아이를 키우란 법이 있나. 남자든 여자든 누군가는 밥을 지어야 되지 않나. 살림은 생명을 기르는 거룩한 일이 아닌가"라며 초심을 다잡았다.

'산굼부리'를 처음 찾은 뒤 상사병을 앓았던 그는 2006년 그토록 그리던 제주에 짐을 풀었다. "노는 것도 때가 있다"는 생각에 사교육의 '광풍'을 피해 수도권을 떠난 길이었다. 2학년 1학기까지 학교 생활을 겪은 아이는 지금 '홈스쿨링'을 한다. 학교를 떠난 아이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있는 오씨는 동시 읽고, 피아노 치고, 그림 그리고, 영화 보고, 책 읽고, 여행 다니는 열세살 딸에게 "나이 서른이 되든, 예순이 되든 스스로 즐거운 일을 하라"고 말할 뿐이다.

살림하는 틈틈이 잠을 줄여가며 '매일 아침 밥상 차리는 남자'(2000년), '헬로우 아빠 육아'(2006년) 두 권의 책을 낸 오씨는 지난 4월부터 표선면 하천리에서 차의 향기가 있는 쉼터인 '둥구나무'를 운영하며 또다른 주부의 일상을 열어가고 있다. 명함도 공간을 알리는 문구가 담긴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그는 가게를 꾸리며 일과 가정을 양립해야 하는 주부가 됐다. '나를 위한 글쓰기 강좌'나 '결혼 준비학'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는 그다.

"서서히 살림에 지쳐가고 있는 반면 글쓰기에 대한 욕구는 강해졌다.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든다."

오씨 부부는 이즈음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중이라고 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590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