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춘택과 석례(4)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춘택과 석례(4)
시대의 틀 깨고 기녀에게 친구라 불러
  • 입력 : 2012. 05.14(월) 00:00
  • /표성준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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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이 유배가 풀려 떠나고 숨진 지 10년 후 그의 매부 임징하가 유배오자 석례는 그를 찾아가 김춘택의 작품 '별사미인곡'을 부른다. 임징하가 이 일을 '서재집'에 기록해 김춘택의 제주 여인이 석례임이 알려지게 됐다. 사진은 석례와 임징하가 만났던 대정현 감산촌(현 안덕면 감산리) 임징하의 적거터.

임징하 '서재집' 통해 석례 존재 드러나
문학·음악 접목 '별사미인곡' 조명 시급

▲김춘택이 제주 유배 중 한글로 지은 가사 '별사미인곡'

김춘택은 석례를 가리켜 '지기(知己)'라 하고 있다. 지기란 지기지우(知己之友), 그야말로 나의 속마음과 가치를 알아주는 친구를 말한다. 어쩌면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요, 내 희로애락의 감정을 잘 꼬집어 내어 표현해주는 나의 분신일 수도 있다. 비록 유배객 신분이었지만 김춘택은 권세를 누리는 가문의 수장이요, 지식인으로서의 존재감과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한갓 변방의 늙은 기녀를 가리키며 "이리하여 나는 오히려 지기를 만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소리가 얼마나 탁월했기에 이런 감탄 어린 고백을 하게 했을까. 조선의 사대부로 하여금 여자와 남자, 귀인과 천인(賤人)이라는 시대가 만들어놓은 틀을 깨게 하고 오직 노래 하나만으로 마음이 통하게 한 그런 친구, 노래로써 당대 최고의 문사로부터 '지기'의 위상을 부여받았던 이 제주여인의 모습은 '별사미인곡' 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보소 저 각시님 서러운 말씀 그만 하오/ 말씀을 들어보니 서러운 줄 다 모르겠소/ 인연인들 한 가지며 이별인들 같을쏜가/ 광한전 백옥경에 임을 모셔 즐기더니/ 어리광이 지나치니 재앙인들 없을쏜가/ 해 다 저문 날에 가는 줄 서러워 마소/ 어떠하다고 한들 내 몸과 견줄 것은 전혀 없네/…… /초나라 가는 허리 연나라 고운 얼굴/ ……/ 대비녀 꽂은 머리 님의 손에 향하였고."

그후 김춘택은 유배가 풀려 떠나 1717년 타계하고 만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후인 1727년(영조 3), 그의 매부인 서재(西齋) 임징하(任徵夏)가 영조의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와 대정현 감산촌(현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에 위리안치된다. 이때 한 여인이 그를 찾아오는데 임징하는 유배 중 지은 시문에 이 여인과 김춘택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놨다.

"어떤 늙은 기녀가 방문했는데 이름이 석례(石禮)라고 하였다. 그녀에게 찾아온 까닭을 물어보니 아마 백우(伯雨·북헌 김춘택)가 유배 와서 살고 있을 때 정을 두었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바야흐로 국화를 마주하여 홀로 술잔을 들고 있었는데 한 곡조 부르게 했더니 실로 백우가 남긴 '사미인곡'이었다. 느끼는 대로 시를 지었다."

임징하의 기록을 통해서 비로소 김춘택의 지기(知己)였던 여인의 이름이 석례(石禮)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제주성 남문 근처에 살았던 그녀는 김춘택의 매제가 유배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정현 감산촌까지 그 먼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던 것이다.

▲임징하의 5대손인 임헌대가 훗날 제주목사로 부임해 감산촌에 세운 임징하의 유허비.

옛 친구가 남기고 간 노래 '별사미인곡'을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스산한 가을바람에 국화꽃 향기마저 떨고 있는 깊은 밤, 늙어서 눈썹마저 다 빠져버린 석례가 단아하게 앉아 소리를 뽑는다.

임징하의 시는 소리를 하는 여인의 눈에도 술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은 유배객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어른거렸음을 은유한다. "한 곡조 사미인곡이 분명한데/ 외로운 신하와 늙은 기녀 함께 수건 적시네/ 눈썹은 오랜 사이 너무 초췌해 버려/ 말을 들으니 무염녀(無鹽女)가 자신(紫宸)을 모셨구나."

김춘택이 만났을 때 이미 초로의 여인이었던 석례는 '무염녀'에 빗댄 임징하의 표현처럼 이미 죽음을 눈앞에 뒀을 만큼 추한 모습으로 늙어 있었다. 그렇지만 석례는 이 유배객에게 절절한 사연이 남긴 노래로 감동을 안겨 결국 훗날 시 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했다. 기녀인 자신을 지기로 대해줬던 한 남자의 노래를 들려주며 석례는 그렇게 늙어갔다.

김춘택의 '별사미인곡'은 제주에서 유배 중 한글로 만들어진 가사문학 작품이라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의 명창 석례에 의해서 그 음률이 다듬어지고 완성되었기에 제주의 향토색이 짙게 반영된 소리(唱), 악곡(樂曲)이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김춘택이 "그 대사가 송강(松江) 것에 비하면 더욱 완곡하고, 그 가락은 송강 것에 비하면 더욱 쓰라리다"고 자평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글솜씨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애절한 가락이 더해져 최고의 소리꾼에 의해 불렸기 때문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 유배문학에서 문학과 음악이 접목된 멋진 사례로 한시바삐 이 작품을 조명하고, 창(唱)도 제대로 복원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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