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되돌린 그때 그 추억](15)김계담 서귀포종합학원장

[사진으로 되돌린 그때 그 추억](15)김계담 서귀포종합학원장
"주산교육은 내겐 숙명이자 사명"
  • 입력 : 2012. 05.17(목) 00:00
  • 이현숙 기자 hs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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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계담 원장. 그 옆에는 정동규 장로. 그외에 사진 속에는 강효숙 현금자 현영숙 오두식 송양순 현상수 고관석씨 등이 함께 있다. 사진은 1964년 서귀포 계명주산학원 제1회 수료식 기념사진.

1964년 계명주산학원 1회 수료식 기억 또렷
무상교육 봉사 온힘… 사회교육 50년 산증인

▲김계담 원장

"35원24전이요, 48원39전이요."

올해로 칠순을 맞은 김계담 서귀포종합학원장은 '사회교육 50년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50년동안 수많은 제자들과 만났고 어려웠던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그는 재건학교(현 오석학교)를 비롯한 많은 학교에서 무상교육을 오래도록 해오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앨범과 기념책자에는 학생들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 그가 조심스레 꺼내든 사진은 1964년에 찍은 것이다. 김 원장의 사회교육 출발은 '주산'이었다. 1962년 4월에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이 개원하고 김 원장은 1963년 2월부터 강사로 근무를 했다. 어려운 유년시절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제주상고를 졸업하자마자 교복을 입은 채 강단에 선 것이다. 그리고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은 1964년 계명주산학원으로 인가를 받게 된다.이 사진은 학원으로 인가를 받고 제1회 수료식때 찍은 기념 사진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가진 어린이들과 학생들의 눈빛이 생생히 살아 있다. 당시 학원비를 감당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 능력이 있고 깨어있는 집안이어야 했다. 그래선지 사진 속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안 자제들이 적지 않다.

김 원장은 1963년 처음 강단에 섰던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가슴벅차 떨렸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학원교육에 첫발을 함께 맺은 서귀분원 원장 정동규씨를 '제2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김 원장은 제주주산학원 송대은 원장과 서귀분원장 정동규 장로와 새롭게 인가받을 학원 이름을 의논했고 결국 솔동산 2층 목조건물에 '계명주산학원'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달게 된다.

김 원장은 "내 삶에, 내가 선택한 길에, 내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기 위해 한 순간도 놓지 않았던 나의 모토는 '성실'이었고 그런 삶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주산'"이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어린시절 아버지가 구해다 준 주판의 추억을 들려줬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는데, 아버지가 '일본제 주판'을 구해다 주셔서 놀랐는데 알고보니 멍석 한 채와 망태기 두 개를 손수 짜서 그 주판과 바꿔 온 것이었어요. 그것이 내 생애 첫 주판이었죠.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그 주판은 1993년 제주도교육박물관에 기증했어요."

김 원장에게 주산교육은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는 서귀포문화원장을 퇴임한 후부터 서귀포시 지역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주산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과거 주산교육은 '두뇌훈련'과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 줬죠. 그래서 1980년대에는 학원 수강생이 600명이 넘었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계산기와 컴퓨터 등이 탄생한 현재에는 '편리함'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두뇌훈련을 통해 집중력·창의력·이해력·응용력을 높이는 효과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사회교육에 몸담은지 딱 50년이 됩니다. 그래서 50년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지만 그것이 마지막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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